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탈 때부터, 아니 훨씬 더 전부터 그가 너무 보고 싶다, 아니 그를 전부 잊고 싶다. 마음은 양쪽으로 맹렬히 달아나다 쉬기를 반복했다. 우리의 만남은 자를 대고 그은 직선처럼 분명한 끝이 있다. 내가 있는 곳에 그가 나타나면 우리는 서로의 삶에선 드문 빛의 파편 같은 시간을 나눠가졌다. 시간표에 없는 시간. 30분, 1시간, 지는 해가 사라질 때까지,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되면 조르는 사람 없이 반듯하게 인사를 나눈다.
"안녕."
"응, 잘 가."
"또 보러 올게."
“잘 지내.”
또 보러 올게. 멀어지는 그의 자동차를 보며 손을 흔드는 동안 꽁꽁 언 마음 위로 바퀴 자국들이 어지러운 무늬를 남긴다. 가장자리부터 녹기 시작한 호수에서 신발은 밑창부터 젖어오고 나는 따뜻했던 찰나의 몇 배를 떨다 언 발을 끌고 간이침대로 돌아오곤 했다.
자다 깬 밤에는 깜깜한 병실 복도를 걸으며 그를 생각했다. 그가 주고 간 연필을 깎거나 그 연필로 그가 주고 간 책에 밑줄을 긋거나 그의 글씨 위에 손을 가만히 얹으면서. 그것은 병실에서 내 의지로 행하는 가장 충실한 일이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얼굴이나 목소리, 문을 열고 들어와 곁에 앉을 때 훅 끼치던 바깥공기와 바람의 잔향. 그런 것들은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상상하는 건 아닐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힘써 구분해야 했다. 그가 주고 간 목도리는 내내 따뜻했지만 그만큼 자주 얼굴을 묻고 울었다. 아주 느리게, 드물게, 혹은 영영 오지 않을 순간들을 상상하느라 일상은 노를 잃은 배처럼 제멋대로 흘러갔다. 밤마다 짓고 부수다 아침이면 흔적도 없는 모래성을 손끝이 아프도록 쌓고 또 쌓느라 빈손만 봐도 가슴이 아렸다.
잘 자.
망설이다 그가 보냈을 문자는 어두운 병실에 작은 빛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쓰고 깜박이는 빛의 흔적이 닳을 때까지 잠들지 못한다. 그가 나의 모든 문장을 읽어주는 것, 그 모든 문장을 애달파 안아주는 것. 나를 그리워하는 것. 내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가 서로의 문장 속에서 겨우 숨을 쉬는 것. 그건 그가 말한 것처럼 영영 잃는 것보다 나은 시간들일까. 그는 두렵지 않을까.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들은 지워도 자국이 남는다는 게. 쓰면 쓸수록 잊어야 할 문장이 더 많아진다는 게.
나는 바다를 보면 내내 바다를 보고 싶고, 길을 걸으면 밤새 걷고 싶은 사람인데. 운동하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하고 멈춰진 건 내내 멈춘 채로 있어야 하는데. 이 시간이 이대로 지속될 수 없다는 것만 빼곤 모든 게 불분명한 이 운동을 나는 어디서 멈춰 세워야 할까. 그게 가능하긴 할까. 각자 견디던 시간으로 돌아가려면 언제 이별해야 할까. 지금껏 쓴 문장을 지키려면, 그의 옆얼굴을 간직하려면, 그마저 영영 잃지 않으려면 어디서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 지금이 아니라면 얼마나 더. 얼마만큼의 문장이 우리에게 허락될까.
흔들리는 버스에서 그는 미동도 없이 내게 기대어 잠을 잔다. 잘 지내. 따뜻한 쌀밥을 한 알 한 알 씹을 때마다, 팔을 길게 뻗어 베고 네가 잠 잘 때마다 너는 끝나지 않는 행복한 꿈을 꿀 거야. 영원한 것들이 뻥튀기처럼 새하얗게 부풀어 너와 함께 춤추는 꿈을. 그러니 잘 먹고 잘 자야 해. 나는 네가 읽지 못해도 다시 글을 쓸 거야. 병원에서도, 버스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네가 바다를 보고 또 보던 것처럼 나도 내 팔로 쓰고 또 쓸 거야. 그러니 잘 지내. 나는 감긴 네 속눈썹 아래로 가만히 속삭인다. 네가 내내 깊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기를.
"나는 우리 집 앞 바다에 모래가 싫었어."
눈을 감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모래 대신 검고 윤이 나는 돌들이 가득하길 바랐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면 도그르르 자기들끼리 몸을 맞대며 구르는 거야. 상상만 해도 귀엽지?"
"그러네."
나는 어두운 버스 안에서 윤이 나는 까만 돌들을 생각했다. 저들끼리 도르락 다르락 소리를 내며 구를 돌들, 바다의 손길로 반들반들 윤이 날 귀여운 얼굴들.
"흐르는 모래 말고 귀여운 돌을 손에 쥐고 싶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매일 윤이 나도록 만지고 싶어. 머리맡에 두고 자면 무서운 꿈도 안 꿀 것 같아. 나한텐 네가 그래. 바다의 돌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쥐고 있는 동안 미리 슬퍼하긴 싫어. 지금은 같이 웃잖아. 이렇게 따듯하잖아. 그러니까 자꾸 애쓰지 마.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그의 말이 도르르 내 손으로 굴러 들어온다.
터미널은 이미 어둡다. 서둘러 도착한 병원 입구에서 우리는 다시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잘 지내."
"또 보러 올게."
"잘 지내."
나는 또 연필을 깎고, 밑줄을 긋고, 밤잠을 설치겠지만. 어떤 기억은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고, 영영 잃고 싶지 않아도 잃게 되는 법이니까. 202호의 커튼 자락이, 바다의 옆얼굴이 어느 날 파도처럼 덮쳐와 고스란히 그 파도를 뒤집어쓴대도 돗자리에 누워 있던 한낮의 볕 역시 함께 따라올 테지. 세월이 흐르면 너와 나 사이에도 그저 편안하고 따뜻한 것만 남는 때가 올까. 내 마음을 그리로 데려가 볼 거야. 순면의 겨울 이불 같은 곳으로. 한 계절의 온기로 나머지 남은 계절을 건널 수 있는. 그게 슬픈 일인지 기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게 기울었던 직선이 꼭 한번 만났다가 그 점을 지나 영영 멀어지기만 한대도 한때 우리가 나란히 앉았던 202호는 바다속에서 그 한 점으로 묶여 있을 테지. 모든 문장이 사라져도 아득하고 깊은 바다가 우리 이야기를 기억해 줄 거야. 나는 이제 옷장 속에서도 바다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네가 있어도, 네가 없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