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말 한 마디 안 하고 하루를 버텼다. 입안에 곰팡이가 필 것 같다. 전학해 온 첫날부터 열흘 동안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1학년 3반, 손바닥만 한 교실에 스물일곱 명이나 있는데!
자기들끼리 곁눈질만 하다가 수군댄다.
“왕따당하다가 도망 왔다며?”
“도망? 주동자라던데?”
“왜 저런 애를….”
뒷문 옆에 앉은 여자애들이 흘끗거렸다. 나한테 직접 물어보는 녀석은 없다. 설명하기도 귀찮다. 내가 먼저 인사하기? 그건 더 귀찮다.
너희들이 어떻게 진실을 알겠냐. 해명한다고 나서봐야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 못 들은 척 창밖만 보고 있어도 코웃음이 나온다.
녀석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씹고 떠들다 뱉어낼 흥밋거리만 바란다. 예전 학교에서도 그랬으니까.
예전 학교와 다른 것이 있다면, 운동장이 두 배는 넓다는 정도? 한적한 시골이라서인가. 깨끗한 운동장에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바람 때문에 모래 회오리가 휘익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먼지 속이라도 좋으니 차라리 운동장을 뛰고 싶다.
의자가 아니라 가시밭에 앉은 것 같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조여 온다.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어깨와 등이 쑤신다.
물론, 그렇게 맞은 적은 없지만 말이다. 전학을 결심했을 때부터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덩치들 서넛이 사물함 앞에 모여 나를 노려본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떠들어댄다.
“저 말라깽이, 뭐하던 놈이냐?”
“기다려. 며칠 있음 쫙 나올 거야.”
“한 주먹도 안 되는 놈이….”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싸움을 걸지 말지,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틈을 노리는 중이다. 간을 보고 있다가 만만하다 싶으면 시비를 걸겠지.
어디에나 빌런이 있으니,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싸움도 싫고,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다.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침묵이 최대 무기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확실해질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자. 수업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교실을 나섰다.
할머니 집은 걸어서 두 블록만 가면 된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오지 않아서 더 좋다. 나만 보면 잔소리를 해대니까.
공부는 열심히 했냐, 진도는 따라갈 만하냐, 새 친구들은 어떠냐, 끊임없이 물어볼 거다. 할 말이 그렇게도 없나. 대답하기 귀찮아 방으로 들어가면 방문 앞까지 따라온다. 엄마 말을 무시하냐면서.
진짜 필요할 때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잖아!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할머니 집에는 재미있는 물건도 많다. 할아버지가 만물상 하면서 팔고 남은 물건이 많아 그것만 구경해도 심심하지 않다.
현관에는 커다란 그림도 걸려있다. 한쪽 벽을 덮는 수묵화인데, 내가 다섯 살 때 할아버지가 직접 그렸다. 나도 조금 도왔다. 강물 위 돛단배도 색칠했고, 초가지붕에 지푸라기도 그려 넣었다. 숲속에도 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었는데, 내 그림은 엉망이라 금방 눈에 띈다.
멀리 눈 쌓인 산이 솟아있고, 아래쪽에는 초가지붕의 마을이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강에 황토 돛단배가 여러 척 떠간다. 강의 왼편에는 울창한 숲, 오른편은 들판과 야트막한 산이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안다. 율도국, 바로 홍길동이 세운 나라이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믿지는 않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할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율도국 그림이 몇 장 더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창고 어딘가 있겠지만, 찾기 힘들 거다.
집에 돌아와 그림 앞에 서면 마음이 녹는다. 딱딱해진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얼음이 녹는 것처럼 말이다. 신발도 벗지 않고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푸른 숲과 강이 실제처럼 느껴진다. 언뜻 보면 아무도 없지만, 서서히 사람들이 나타난다.
논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강가의 어부들도 진짜 같다. 들판을 지나가는 장사꾼 행렬도 나타난다. 때로는 풀잎 향기도 나고, 어떤 날은 물비린내도 섞여 있다. 역시 할아버지의 그림이다.
만물상에서는 못 구하는 물건이 없었다. 신기한 물건도 많고, 물건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았다. 할아버지는 율도국을 무척 좋아하셨다. 아주 생생하게 설명해서 어릴 때는 그 나라가 진짜 있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 살아계셨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실 텐데. 엄마와 아빠는 야단만 쳐서 말도 꺼내기 싫지만, 할아버지는 다르다. 진짜 조언을 해주셨을 것이다.
그래, 아쉽지만, 오늘도 그림을 보면서 힐링하자. 어쩌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잖아.
힘껏 현관문을 열었다. 기대에 차서 들어왔는데,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작은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있었는데? 할머니부터 찾았다.
“할머니! 여기 그림 어디 갔어요?”
“그림?”
안방에서 할머니가 소리쳤다.
“현관에요. 여기 걸렸던 그림요.”
“뭔 그림?”
할머니는 막 낮잠에서 깨어나 하품만 계속하신다. 현관까지 나와서도 눈만 껌뻑거렸다.
“무슨 그림 말이여?”
“할아버지가 그린 그림이요. 여기 걸려 있었잖아요.”
그림 대신 가족사진만 있다.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은 한 살짜리 꼬맹이가 바로 나이다. 다섯 식구라도 네 사람처럼 보인다.
“에고, 우리 강아지가 힘들었나 보네.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디.”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닌데. 여기 그림이 있었는데. 열흘 전, 내가 이사 온 날부터 쭈욱.
“그건 어디 갔어요? 크기가 이만한….”
팔을 벌려 크기를 가늠하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현관이 좁아서 그렇게 큰 그림은 걸 수가 없다. 작은 가족사진이 딱 맞다.
생각해 보니 지난 설날에도 이 자리에 가족사진이 걸려있었다. 추석에도, 그전에도.
‘뭐지? 그 큰 그림이 현관에 꼭 맞아 보였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여기 온 첫날부터 난 뭘 본 거지?
신발을 벗다 말고 돌아봤지만, 그림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반 아이들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졌나.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환각을 보았나.
힐링이고 뭐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루가 지나도 그림 생각뿐이다. 교실에서 아무도 말 걸지 않아 다행이지, 누군가 날 건드린다면 머리가 터져버릴 거다.
아무래도 창고를 뒤져봐야겠어. 분명 내 눈에 그림이 보였다고.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시던 그림이. 주말에는 시간이 나니까, 그때….
운동장만 바라보며 이리저리 궁리하는데 누군가 뒷문에서 소리쳤다.
“정지민! 담임이 오래.”
내 이름과 ‘담임’이라는 말에 웅성거리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왜 그런대?”
“드디어 터졌나.”
반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수군거리는 모습이 꼭 사냥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다. 교무실은 정말 가기 싫다. 담임이 좋은 일로 나를 불렀을 리 없잖아.
담임이 신경 쓰는 학생은 두 종류이다. 우등생 아니면 문제아. 그 중간에 끼어서 적당히 투명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어째서 나를 부르냐고!
1학년 교무실에는 담임 혼자였다. 앉아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퉁퉁하고 살집이 많아 인상은 좋아 보이지만, 선생님들을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언제 가면을 벗을지 모르니까.
책상 위에는 학교생활기록부가 펼쳐져 있었다. 내 사진과 이름이 보였다.
“어떠냐? 친구는 사귀었고?”
“예.”
사실대로 대답하면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 대충 대답했다. 담임은 볼펜 끝으로 생활기록부를 두드렸다.
“너 그림 잘 그리는구나. 미술대회 나가서 상도 몇 번 탔고.”
“예.”
담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학교에서 사유서를 보냈을 테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미대 진학할 거냐?”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미술대회에서 상을 탔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미술을 전공하라고?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지만, 난 포기할 줄도 안다.
“그러냐? 재능이 아깝네. 자율 활동은 왜 신청 안 했어? 애들 다 하는 거야.”
“고민 중입니다.”
짧게 대답했다. 며칠 전, 반장이 신청서를 쓰라고 했지만,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보지 않았다. 자율이니까 내 마음 아닌가. 말은 자율이면서 그것도 의무라니. 시골 학교는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담임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새로 출력한 신청서를 내밀었다.
“미술부는 미대 진학하는 애들만 가니까 거기서도 겉돌 테고. 어떠냐? 연극부 들어와라.”
“연극부요?”
뜬금없는 제안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졌다.
“내가 연극부 지도하는데, 소품 담당이 없거든. 애들이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한단 말이야. 네가 딱인데? 어떠냐?”
당연히 싫다. 말이 좋아 소품 담당이지, 귀찮은 일을 떠맡는 거잖아. 아무도 하지 않는 골치 아픈 일이다.
싫다고 대답하려는데, ‘소품’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문득 할아버지의 만물상이 생각났다.
가게를 가득 채웠던 크고 작은 물건들이 머릿속에서 달그락댔다. 여러 나라 인형과 도자기에서부터 전통 고가구와 문방사우까지, 그야말로 세계가 한 곳에 있었다. 벽을 따라 옛날 그림도 많이 걸려있었다. 그림 족자가 너울처럼 펄럭거렸다.
‘그래, 그때도 갑자기 그림이 사라졌어!’
어릴 때라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나는 가게 진열대 아래 숨어 신기한 구슬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야구공만 한 유리구슬 속에 반짝이는 별이 잔뜩 들어가 은하수처럼 보였다. 어두운 구석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냈다. 너무 신기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들어간 것도 모르고 계셨다. 그림 그릴 때는 누가 불러도 못 듣고, 가까이 가도 모르셨으니까,
작업대 앞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붓을 내려놓았다. 그림을 들고 흠흠 소리도 냈다. 마음에 든다는 표시였다. 무슨 그림인데 저렇게 좋아하시나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들고 있던 그림이 갑자기 사라졌다. 너무 놀라 숨이 막힐 정도였다. 손에서 구슬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만도 기적이다.
어떤 그림이었지? 사람은 아니었어. 짐승 같았는데…. 도깨비나 그런 거였나? 현관에 있던 그림이 사라진 것도 그런 걸까?
드르륵 의자 바퀴 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여기 교무실이었지.
“그럼, 그렇게 알고 부장한테 연락하마. 청소년 연극대회 나간다고 벼르고 있거든.”
담임의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예?”
“네가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다. 손재주도 좋다며? 꼼꼼하고.”
담임은 생활기록부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하나도 안 좋은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꾸벅 인사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귀찮다. 학교에서 하는 일은 다 쓸모없다. 공부도 시험도, 자율이니 창체니, 말이 좋아 창의지 그게 무슨 창의야. 연극부 소품 담당? 생각하기도 싫다.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는데, 세상이 날 놔두지 않는다. 연극부 부장이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다.
수업 끝나고 스마트폰을 켜니 문자가 여섯 개나 와 있었다. 하나는 엄마가 보냈고, 하나는 스팸 문자. 나머지가 연극부장이 보낸 것이다. 무려 네 개나!
‘정지민! 나 연극부장. 소품 담당 자원해 줘서 고마워. 잘 부탁해.’
‘내일 오후 6시 임시 모임. 대본 관련 회의. 연극부실은 별관 지하.’
‘암행어사물. 느낌대로 배경 스케치 한 장만.’
‘자기소개 준비해. 2분 이내.’
뭐냐? 난 결코 자원한 적이 없거든. 암행어사? 암행 나가서 칼 맞을 소리 하네. 얼굴도 모르면서 뭔 일을 이렇게 많이 시켜?
머리만 아픈 게 아니고 가슴까지 답답해졌다. 이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지내려고 했는데, 시작부터 꼬였다.
“아우!”
화가 치민다.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둘렀다. 빨리 학교를 벗어나자. 가서 창고나 뒤져야지. 이 기회에 청소도 하고, 힐링도 하고. 기억대로라면 분명히 거기 단서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