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죄가 없어요
오늘은 좀 우울한 날입니다.
일주일 만에 회사에서 잘렸거든요.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는 하지만 제 입으로 퇴사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많이 비참하고 억울합니다.
입사한 날 팀원들이 다 코로나로 인해 출근을 하지 않아 혼자 팀을 지켰습니다. 제가 입사한 둘째 날, 팀장님은 제게 업무 지시를 내렸습니다. 좋았습니다. 가볍게 워밍업 하면서 업무 히스토리도 찾고 핏도 맞춰가는 것은 좋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디자인 레인지가 너무 넓었습니다.
운영 디자인과 UI/UX 디자인을 한꺼번에 쏟아줬습니다. 러프하게 하라고, 루시아님의 역량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담당 기획자는 부재중이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은 사내 이벤트와 티타임으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팀 막내는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쓰고 보니 변명할 거리는 차고 넘치네요.
분석과 레퍼런스에 하루를 보내고, 디자인 제작에 하루를 보내고 중간 점검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서비스 분석도 못 끝낸 채 기획서만으로 제작한 아웃풋은 제가 봐도 조악했습니다. 그래도 얼굴에 철판 깔고 컨펌받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중간 점검은 받아야 하잖아요. 팀장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도 지하차도 마냥 점점 낮아졌습니다. 그래도 3일 동안 이 정도 했으면 잘했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스스로 위안을 했습니다. 그게 문제였을까요.
주말 동안 피드백을 바탕으로 열심히 수정하고 나머지 30%를 채워 월요일에 다시 컨펌을 받았습니다. 담당 기획자와 합을 맞춰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결국 팀장님께 기획 부분을 여쭈어가며 수정 작업을 했습니다. 급하게 한 나머지 테이블 정렬이 안 맞았습니다. 러프하게 넘어가야 하는 곳은 러프하게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저의 판단 오류였나 봅니다. 정렬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하셨습니다. 재 컨펌을 하시는 팀장님의 표정을 정말 썩어 들어갔습니다.
상세 페이지는 팀장님이 말씀하신 피드백 그대로 수정했습니다. 상세 페이지에서 컨펌이 중단되었고 더 이상 은 못봐주겠는지 잠깐 저 좀 보자고 하십니다. 왜 본인이 피드백 해준 그대로 해갖고 왔냐고 하셨습니다. 포트폴리오만 보고서 본인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었던 같다고 하십니다.
"작업하면서 뭐가 제일 어려웠어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부족한 거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시간이 부족하다면 시간은 더 줄 수 있다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마 시간을 더 주더라도 더 이상 퀄리티가 높아지지 않을거라 판단하셨겠죠. 가이드를 줄 수 있었지만 저의 역량을 보고 싶으셔서 일부러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나이에 비해 경력도 짧지만 저를 뽑은 건 포트폴리오에서 끼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면접을 보면서 저랑 일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채용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결과물은 완성도와 기본기가 너무 떨어진다고 힐난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경력자가 이러면 안된다고 질책했습니다.
본인도 멘붕이 와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레퍼런스 안 찾아봤냐고 하십니다. 물론 레퍼런스 열심히 찾았습니다. 레퍼런스를 안 찾는 디자이너는 없습니다. 단지 정량적으로 충분히 찾아보지 못해서 안 찾아봤다고 해버렸는데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안찾아본 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래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디자인 레인지를 운영과 UX/UI 중에서 하나로 줄여 주면 집중력 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일주일만에 판단하시냐고, 좀 더 지켜봐주시면 역량을 펼칠 수 있을거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안된답니다. 엄청난 퀄리티나 퍼포먼스를 요구하는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하겠답니다. 말로는 대단한 게 아니라지만 얼마나 대단한 퀄리티를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막내를 가르쳐야 하는 포지션인데 막내에게 배워가면서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랍니다. 대화는 계속 겉돌았습니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팀장님도 많이 힘들어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그럼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참지 못하고 결국 제가 이야기해 버렸습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습니다. 팀장님은 붙잡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답을 들은 거겠지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속이 상하답니다. 좀 치사하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자존감이 떨어지고 암담해서 눈물이 나는 걸 겨우 참았습니다.
그래도 제 딴에는 배려하겠다고 '팀장님은 회사에 남으셔야 하니, 제가 회사와 안 맞아서 퇴사하는 걸로 하시죠' 라고 합의를 봤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참함과 황망함이 밀려들었습니다. 창피해서 어디 가서 나 잘렸다고 얘기도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찌질하게 하소연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쪽팔립니다.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그래도 다시 멘탈 잡고 구직 활동하렵니다. 주저앉아 있는다고 해결될 거는 없으니까요. 피해자 코스프레도 여기까지만 하렵니다. 누가 뭐래도 제 실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거니까요. 3.5일만에 프로모션 배너와 상세페이지(반응형 포함), 결제정보 페이지와 쿠폰 적용 테이블 UI/UX를 완벽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디자인 공부를 차근차근 하려 합니다.
자존감 회복을 위해 맥주를 일단 한 캔 마시고 '내가 쓰레기가 아니라 세상이 쓰레기야' 라는 뻔뻔함을 장착하고 제가 잘하는 것, '도전'을 또 하려 합니다. 이 글을 읽고 도대체 얼마나 못하길래 일주일 만에 짤려? 하시는 분이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부족하지만 제 역량과 포트폴리오가 궁금하신 분은 프로필에 올려두었으니 봐주시고 피드백도 감사히 받습니다. 너무 쓰리게만 후두려 패지 마시고 긍정적인 피드백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오늘도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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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울고백이진도울고나희도도울고수습기자도울고
#회사는죄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