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이김 Feb 23. 2021

봉천동 귀신보다 더 무서운 봉천동 실화


그 날 밤 나는 친구와 놀다 봉천역으로 가고 있었다. 이 봉천역이 예전 인기 있었던 공포 웹툰 ‘봉천동 귀신’의 그 봉천인지 검색해보며 시장 골목을 빠져 나왔다. 큰 대로변에서 왼쪽으로 트니 봉천역 표지판이 빛나고 있었다. 봉천역까지 한 100미터 정도가 남아 있었을 때 우리 옆의 6차선 도로 가에 하얀 택시가 서더니 거기에서 한 여자분이 내렸다. 사실 내렸다기 보다는 매우 비틀거리며 차 안에서 튕겨져 나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윽고 내린 택시 기사는 굉장히 좋지 않은 표정으로 튕겨져 나간 여자분을 한번 째려 보더니 그대로 출발해 버렸다. 여자분은 길 한복판에 한동안 쭈그려 앉아 있었다.


나와 함께 걷던 친구는 한동안 일어서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우리가 그녀를 도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와 친구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니 그녀는 '여기가 어디예요?' 를 거듭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서울대 입구역 근처에 산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혼자 갈 수 있겠냐 물은 후 서울대 입구역은 저 쪽이에요, 하고 가리켰다. 힘드시면 지금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하니 그녀는 극구 손사래를 치며 가버렸다. 나와 친구는 물론 그 자리를 바로 뜨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그러고 가던 길을 갔겠지만 우리는 한참동안이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그녀는 길 한복판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던 데다가 영 말을 못 알아듣지도 않았기에 그 정도면 집에 찾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았다. 그녀는 똑바로 걷지 못하고, 발을 몇 번이나 접질렀으며 문이 닫힌 가게 문에 몇번이나 부딪치다 튕겨져 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한 블럭 정도나 멀어져 가고 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봉천역 말고 그녀가 향하는 서울대 입구역까지 따라가보자고 했다. 그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 주는 중이었고, 나는 어찌 됐건 2호선만 타면 됐기에 반드시 봉천역으로 갈 필요도 없었다. 봉천역은 코 앞이었지만 나와 친구는 그녀의 안위도 살필 겸 그녀를 따라 서울대 입구역으로 향했다.


몹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외에도 그녀는 이미 빨간 불로 바뀐 6차선 도로 횡단보도를 그냥 막 내달려 우리를 식겁하게 했다. 다행히 초록불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들이 모두 출발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정말 교통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눈으로 맞은편 도보를 가고 있는 그녀를 확인해가며 걸었고 다음번 횡단보도에서 그녀가 있는 도보로 건너갔다. 아마 그 때 그녀를 확인하지 못하는 아주 약간의 틈이 생겼을 거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양 옆을 살피고, 이야기를 해 가며 걷느라 잠깐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쨌거나 그녀는 비틀거리긴 했어도 아마 자기 집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곳은 지하철 역이 있는 아주 큰 도로변이었기에 특별한 위험은 없었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다 건넌 후, 다시 눈으로 열심히 그녀를 좇았을 때 우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는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옆에 갑자기 어떤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대화를 나누던 나와 친구는 동시에 그 모습을 보고 말이 없어졌다.  


... 이렇게 갑자기?


아는 사람이 데리러 나온건가, 남자 친구인가, 하며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그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아주 다정하게 손을 두르고 있었다. 친구는 속도를 내서 나를 앞질러 더 빨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남자에 대해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걸음걸이 속도를 높인 것은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의 어깨를 감싼 남자의 뒷모습을 아무리 봐도 자초지종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직감적으로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동무를 한 그 둘은 큰 대로변을 걷다가 편의점을 지나쳐 갑자기 어두운 골목으로 좌회전해서 쑥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고, 친구는 더 걸음을 재촉해 그들에게 거의 다다랐으며 나는 그들을 향해 뛰었다.


내가 뛰어가니 친구가 그 남자에게 말을 걸어 그 둘은 일단 그 골목의 어귀에서 멈추어 있었다. 참고로 내 친구는 네덜란드인이라 영어로 말을 걸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다가가서 그에게 물었다.



- 아는 분이세요?



그 남자는 한발짝 물러서며, '아니요,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셔서요.

 


나는 그 말이 매우 거슬렸지만 지금은 이 여자를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와는 더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해롱거리며 서 있는 여성분에게 이번엔 아주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  집 어디예요?


- 다 왔는데. 근데 열쇠가 어딨는지 모르겠는데. 열쇠가 여기 있는데...



이제 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망설임없이 그 여자분의 가방 안을 뒤져서 열쇠를 찾아냈다. 여기 있네요, 열쇠. 나는 열쇠를 여자에게 쥐어주고 빨리 재촉했다.



- 빨리 가요. 집 어디예요?


- 갈 게요. 갈 게요.



정신이 없는 그 여자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또 가만히 서 있길래 나는 더 단호하게 말했다.



- 지금 당장 가세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 거에요. 가세요. 집에 들어 가세요.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내가 열쇠를 쥐어준 대로 들고 어디론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입구역은 매우 번화한데 이상하게 그 골목은 역 근처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가로등 하나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대로 계속 따라가서 봐 주었다. 얼마 걷지 않아서 그녀는 오피스텔로 보이는 건물의 출입 비밀번호를 눌렀다. 내가 팔짱을 끼고 그녀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내 친구와 그 남자가 내 뒤까지 따라와 섰고, 자동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가자 우리 모두는 방향을 틀어 다시 큰 대로변으로 나왔다.


네온사인과 가로등으로 환한 큰 대로변에서 그 남자의 모습을 다시 봤다. 물론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했다. 마스크를 끼고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인상, 그리고 그에 따른 직감 뿐이다. 그는 대로변으로 나오자 먼저 발랄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어디로 가시나요?


- 전 서울대 입구역으로 가요.


- 아, 저는 반대 방향 봉천역으로 가야 해서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는 처음 우리를 봤을 때 당황하던 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봉천역으로 향했다. 서울대 입구역을 향해 걷다가 지하철역 표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나와 내 친구의 대화는 다시 재개되었고 우리는 말을 안 했다 뿐이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 그 남자, 정말 그 여자를 도와주려던 걸까?



친구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일련의 상황을 보고 그가 남자친구나 아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아챘다. 친구 역시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 저 남자 말로는 도와주려고 그랬대. 그게 믿어져?


-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지.


- 만약 진짜 도와주려는 거라고 쳐. 근데 왜 굳이 그렇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감싸고 가야만 하지?


- 마치 남자친구처럼.



그 일은 도저히 범죄가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번화한 대로변에서 일어났으며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우리 외에도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그 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 상황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나와 내 친구였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걱정되어 봉천역 입구에서 굳이 방향을 틀어 거기서부터 서울대입구까지 그녀를 지켜보면서 따라온 우리 같은 사람.


그 남자의 수상한 점에 대해서 친구와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 남자가 정말 우리 속의 선량한 청년의 모습이었던 것이 떠올라 너무 기분이 나빴다. 우리 틈에 섞여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때로는 여성을 위하는 다정한 남자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셔서요. 요즘같은 세상에 정신이 똑바로 박힌 남자라면 오해받기 싫어서라도 그렇게 집에 낼름 따라갈 수가 없다. 그것도 아주 다정하게 마치 아는 사람처럼 어깨동무까지 해 가면서까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 먼저 묻고, 내가 대답하자 자긴 그 반대로 가야한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고 가버린 마지막 모습까지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봉천역으로 간다고 하면 그는 서울대입구역으로 간다고 했을 것이고, 내가 서울대 입구역으로 간다고 하면 봉천역으로 간다고 했겠지.


나와 친구는 그녀를 그냥 보도 한가운데에 두고 떠나버린 택시 기사를 욕했고, 누구인지는 몰라도 같이 술자리에 있었으면서 그녀를 홀로 보냈을 사람들도 욕했다. 그리고 이 비정하고, 특히 여자에게 너무도 폭력적인 세상을 욕했다. 세상이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


우리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에게 모르는 사람이지만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며 그녀를 눈여겨 봐 준 것을 고맙다고 했고 그는 나에게 서울대 입구역까지 어차피 2호선이니까 따라가보자고 한 것을 고맙다고 했다. 아마 둘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우린 그 여성분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인생을 구하는 것이 이렇게 복잡하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마음 먹자면 못할 일도 아니다. 다만 관심이 필요할 뿐. 우린 힘을 합쳐 한 여자의 목숨을 구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하이파이브를 했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 이 글을 읽고 그러길래 왜 여자가 술을 그렇게 마셨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디 없길 바라며. 누구에게나 그러고 싶은 날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번째 결혼을 위한 조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