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내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 왔다.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해도 이런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원래 브런치는 글쓰기 습관을 잡기 위해서, 글을 세상 밖으로 꺼내고 좋든 나쁘든 피드백을 받기 위해서와 같이 다분히 의식적인 노력의 공간이었다. 나의 아프리카 생활기가 완성되었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동안 글을 쓰는 습관을 잡고 세상에 내 글을 공개한다는 소정의 목적은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
친구는 항상 가을이 바쁘고 지치는 시기라고 하는데 나에겐 여름이 그런 계절이다. 잔인한 계절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에세이에 있어선 목적을 달성했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갈증을 발견한 것과 더불어 서울문화재단에서 공고한 흥미로운 프로젝트 공고를 보면서부터, 그 때가 바로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나에겐 이상한 욕망이 있다. 그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굳이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에세이도 내가 쓰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없는 글이지만 다른 문학 장르인 시와 소설에 비하면 한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에세이는 실제 일어난 에피소드가 그대로 들어가있는 글이다. 하지만 시와 소설은 내가 어떤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허구의 글이다. 그 경험을 그대로 쓰지 않고 다른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며 많은 추상화 과정을 거친다. 그 추상화 과정이란 불필요한 것을 빼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는 행위나 다름없고, 그래서 남는 것은 '대진리' 뿐이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어떤 비유와 상징으로 진리를 드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에세이를 쓰다가 깨달았다. 하지만 이 작업은 내가 겪은 일을 재구성하여 드러내고 얻은 깨달음을 토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에세이의 스타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빚어야 하기에 구체적이어야 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추상적인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전엔 깨닫지 못했던 내 안의 장벽을 느꼈다. 내 안에 구속이 있다. 어떤 구속이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색채와 형태, 박자를 전혀 찾지 못하는 구속이었다. 에세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의식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런 주제를 드러내고 싶으니 이런 장면을 생각했고, 그 다음엔 주인공은 이런 캐릭터이니 이런 설정들을 집어넣었다. 어떤 논리와 빌드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는데 바로 그 '생각'을 따라 다 적어내리고 보니 아무런 매력이 없고 갑갑하기만 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서울문화재단 프로젝트 <재활용의 날>을 하면서 3개월 동안 책을 읽었고, 시를 썼고, 소설을 썼다. 하지만 내가 단순히 독서와 시와 소설쓰기 연습이라는 인풋을 넣어 지금의 변화를 겪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포인트란 '내가 끌리는' 책을 읽었고, '내가 원하던 어떤 강렬한 정념의 날에' 시를 썼으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소설을 썼다는 데 있다. 이 시기에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마침 이런 고민을 겪고 있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 당장 네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라.
잘 쓴 글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내 안의 어떤 기준과 관념에 나는 구속당해 있었다. 내 이야기들은 그 잘 쓴 글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기준에 맞춰서 써보니 그 글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그랬기에 거짓이었다. 대진리는 거짓된 글에서 나올 수 없다. 이런 생각 변화를 겪다보니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어떤 구도 행위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텍스트는 단지 수단일 뿐이다.
<재활용의 날>을 위해 일을 하는 와중에 지속적으로 친구와 회의를 했고, 글을 쓰고 읽고 어떤 날은 버리기도 했으며, 막판에는 그렇게 잠이 많은 내가 며칠 밤을 하얗게 새기도 했다. 이것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잠이 오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사실 직장 생활 5년차가 넘는 지금 이 시기에, 체력이 꺾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이 시기에 나에게 이런 정도의 —그것도 이전에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정도의—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일요일 밤에 새벽 4시 반까지 넘어 작업을 하다 두시간 정도를 자고 밖으로 나갔다. 두 어시간 자고 월요일 출근을 하면서도 이리도 상쾌할 수 있다는 것에 처음엔 웃었던 것 같다. 아침 햇살이 잎 너머로 비쳐 오는 가로수를 보면서 계속 걸어갔다.
다음 순간 나는 아침 공기를 일부러 들이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여태 나는 아침이 이렇게 상쾌하다고 생각한 적이 정말 몇 번 없었다. 그 몇 번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낯익은 공간이 아니라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낯설은 공간으로 갔을 때나 가능했다. 어딘가로 무언가를 하러 가야만 하는 월요일 아침에, 그것도 잠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웃어본 적은 그 날이 처음이었노라고, 그리고 어쩌면 나는 평생 내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생각했다.
—내 안에 구속이 있었다.
난 진작에 이렇게 살았어야 했다.
진작에 내가 꿈꾸던 대로 했어도 됐다.
나는 최고의 결과를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선을 살고 싶을 뿐이다.
내 안의 거대한 열기는 녹일만한 어떤 것을 갖지 못했기에 대신 내 속을 태웠다. 쓰임새를 찾지 못한 열정은 녹슬어 나를 아프게 한다.
이젠 아무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불이 붙은 이 곳에 더 크고 단단한 불쏘시개를 넣을 것이다.
그것은 구속에서 해방된 자가 깨달음의 끝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사람들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는 아침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