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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Dec 13. 2021

대한민국의 희망이 저기에 있다


1.

롱패딩을 목끝까지 잠그기 전의 겨울날이었다. 그 날 약속이 있어 나와 친구는 젊음의 거리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홍대를 지칭하는데 굳이 젊음이니 뭐니를 운운하는 것부터가 거기 가기엔 연식은 좀 된다(?)는 뜻이다.


2.

지하철 출구 계단 앞에선 아이돌 스타를 응원하는 전광판과 만날 이를 기다리는 이들을 비껴가야 한다. 나는 이젠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돌 스타의 얼굴과 만남으로 들뜬 대학생들의 얼굴 사이로 이들을 감당하기엔 유난히 좁은 계단으로 파고 들었다.


3.

계단은 원래 너비보다 좁게 느껴져 더 위로 솟은 것처럼 보였다. 그건 층계의 중앙 지점에 한 가지 넘어야 할 블록이 있기 때문이다.


4.

한 노숙자가 두 손을 하늘로 펴든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 아래엔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계단을 걷는 이는 나 하나와 약간 사선 방향에서 내 뒤를 따라오고 있던 여대생 뿐이었다.


5.

나는 애써 그를 의식하지 않고 걸으려고 했으나 주머니 속에서 카드 지갑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서울에 오기 전부터 지갑 없는 삶을 살았지만 한번도 불편한 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 오고 나서부턴 급하게 현금을 찾아야 하는 단 한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6.

그 옛날 젊음의 거리에 어울리던 나이를 조금 지나서 그런지 그 때 없던 현금 오천원이 카드 지갑 안에 있었다. 나는 이미 지상으로 왔지만 오천원을 확인한 후 걸음을 멈췄다.


7.

오천원을 쥔 후부턴 올라오던 속도와는 비교도 안되는 속도로 내려갔다. 뜻밖의 교통 사고가 일어날 것이라곤 전혀 예감할 수 없었을 만큼 나는 그의 검은 손바닥만을 보고 달렸다.


8.

오천원을 건네던  손이 만원을 건네던 손과 부딪쳤을  그에 걸맞는 굉음이 일었다.


“따뜻한 밥 사드세요.”


9.

그러고 나서야 그 손의 주인이자 이 폭발음을 낸 멋진 악당을 볼 수 있었다. 아까 나를 뒤따라 계단을 걸어오던 그 여대생이었다. 그녀도 굳이 길을 돌아와 윗 계단에 서 있는 나를 훑어보더니 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10.

오랜만의 홍대는 북적였지만 옛날만큼 짜릿하진 않았다. 젊음의 거리라고 느낄만큼의 인파도 없었거니와 한국의 밀집된 맛집이 생경한 외국인들의 표정만 떠다녔다. 이 곳이 젊음의 거리였던 것은 그 거리를 걷던 내가 젊었기 때문이었을까.


11.

젊음은 가셨어도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기에 나는 홍대 거리를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희망은 지하철 출구 계단에 웅크려 있던 검은 손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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