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반지만으로 괜찮은 건 없어
작년 연초부터 붓기 시작한 적금이 4월 5일 자로 만기가 됐다.
이번 건 액수가 좀 커서 도중 몇 번은 부모님께 손을 벌릴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완주했다.
벌써 몇 번 째 적금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쪼잔한 인생을 살아서인지, 아득한 목표로만 생각했던 금액이 기어코 통장에 찍혔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 하고 렌더링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 긴 숫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거 같다.
작은 아파트를 구하려고 했었지.
창원이면 더 좋을 거고, 그게 아니더라도 서울 근교의 작은 소도시를 알아봐서.
그 때는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던 시절이라 그 애에게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이 적금이 만기될 쯤엔 내 통장에 얼마가 찍혀있을 거고, 그 돈은 적어도 두 사람의 미래를 계획할 정도는 될 것이기에.
그런 마음으로 매달 돈을 모았다.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해야지'
그 때는.
지금은 그 애와 헤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만남을 이어갔어도 건강할 게 없을 연애였다.
인생의 어느 시점엔 분명히 그 애와 헤어졌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빨리 관계가 정리된 게 오히려 행운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은 분명히 다른 거니까.
그 때의 나는 회사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면 가장 먼저 JAX의 Ringpop을 듣는 게 업무의 시작이었다.
그러면서 그 애와의 연애를 노래로 표현하면 이렇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결혼으로 연애를 마무리짓는 친구들을 보며,
'내 이벤트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막연히 가늠해 놓은 규모 같은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프로포즈는 어디서, 반지는 어떤 모양, 식장은 어떻고 하는 그런. 반짝이고 예쁜 것들.
그 애랑 만나는 동안 그 규모는 힘없이 무너졌다.
진짜 존ㄴ게 우습고 쪽팔린 개념인데 ‘사랑’ 때문이었다.
가사처럼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보석반지 사탕으로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 사람과 계속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거창히 가진 건 없어도 남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그런. 순진한 감정.
헤어지고 나선 단 한 번도 이 노래를 듣지 않았다.
그 애는 떠났어도 그 애와의 미래를 담은 적금은 남아 있었으니 일을 계속 해야 했고,
뜻하지 않게 준비할 것들이 생겼고, 새롭게 벌려놓은 일들도 늘어났으며, 감당해야 할 새로운 사람들도 내 인생에 들여야 했다.
팔자좋게 옛 연인이 떠오르는 노래를 들으며 청승에 젖을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애써 괜찮아진 마음을 또다시 그 날의 새벽으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렇게 유튜브 알고리즘의 저주를 쏙쏙 잘 피해가던 나는 한참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 노래를 검색했다.
내 피드 추천 영상에 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노래가 사라질 만큼 이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노래를 듣는 일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 애와 헤어진 건 여전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애가 생각나는 새벽이 가끔 찾아오면
편지지를 꺼내 놓고(될 수 있으면 내가 가진 것중 가장 예쁜 걸로) 편지를 썼다.
부칠 마음으로 쓴 것도 아니었지만 활자로 뭔가를 적고 나면 일면 마음이 후련해지긴 했다.
그 편지를 안 쓴 지도 벌써 6개월이 다 되었다. 이제 나는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아서 씁쓸하다.
무려 같이 살 결심까지 했던 사람을 이렇게나 빨리 잊어도 되는 걸까.
"말하자면 아가씨는 햇살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아주 깊은 바다인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가씨의 빛을 다 끌고 들어가는 거야. 음침하고 속을 모르겠어서 계속 만났어도 아가씨의 빛을 다 삼켜버렸을 사람이야. 헤어지길 잘했어. 2023년에 만나게 될 사람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때가 돼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예요."
헤어지고 친구 소개로 알게된 철학관에서 사주를 봐주시는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이었다.
"관심이 가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예전 연인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보이면 거기서 마음을 멈춰버리는, 옛 연인을 못 잊어서가 아니라 더이상 그런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옛 연인이 지금까지도 당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습인데요."
이건 약속시간보다 일찍 만난 친구와 시간때울 겸 들어간 타로집에서 들은 말이었고.
그래서 그 애와 헤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의 나는 누군가와의 미래가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생각한 적금을 붓고 있다.
작년만큼 큰 액수는 아니다. 이젠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 때 철학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2023년에 만나게 될 사람'은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늦게 와도 괜찮다. 아예 안 나타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난다던 예언보다 "아가씨는 햇살 같은 사람이야"는 말이 더 기분 좋았었으니까.
다만 앞으로는 '보석반지로도 괜찮은' 사람은 만나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