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시각에서 본 부모의 이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부부의 세계> 지선우의 대사-
지선우와 이태오의 아들 이준영은 완벽한 가정의 착한 아들이었다. 지역 병원의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병원 부원장인 엄마와 영화 감독이자 엔터테인멘트 사업을 운영하는 아빠 사이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고 아이와 자주 소통하는 모범적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경제적으로도 넉넉했지만 부모와도 긍정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가끔은 엄마에게 학원이 너무 빡빡하다고 불평하고 아빠에게 함께 야구 캠프를 가자고 조르는 귀여운 딱 초등학교 6학년 13살, 그 나이 만큼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면서 아이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빠가 얼른 그 여자와 관계를 정리하고 엄마가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주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결국 엄마는 잘못을 저지른 아빠를 궁지에 몰았고 이혼했다. 몸은 다 큰 것 같지만 아직 정신적으로는 어리기만 한, 그리고 이제껏 평탄하고 풍족하게 자라나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준영이에게 부모의 이혼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사건이었다.
아이는 이혼 직전에 아빠가 엄마를 폭행해 피가 흐르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모가 이렇게 심하게 싸운 것도 충격인데 늘 다정하고 함께 놀아주던 아빠가 저런 사람이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면에서 '준영아, 사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이라며 아빠는 아들에게 변명을 하려 하고 순간 준영이는 이렇게 소리친다.
내 몸에 손대지마. 나 이제 아빠 아들 아니야!!!
그렇게 준영이는 셋이 살던 집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되고, 아빠 이태오는 아들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받고 고산을 떠났다가 2년후 성공한 영화감독이자 새아내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엄마는 좋은 의사선생님이고 아들에게 충실한 엄마였지만 아들 입장에서는 갑갑한 면도 있었다. 간식으로 과자를 먹으려 하면 '몸에 안 좋아, 배고프면 이거 먹어' 라며 방울토마토를 꺼내주고 지금도 학교 마치고 학원 다니느라 힘든데 수학이 부족하다며 학원수업을 더 넣으려고 한다. 하루 학원을 안 갔을 뿐인데 연락이 안 된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고 나를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무섭다는 중학교 2학년,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이런 관심이 간섭과 과잉보호로 느껴지고 엄마에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아빠와 함께 살 때는 엄마가 조금 엄격해도 아빠에게 가면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작년 야구캠프에는 아빠와 함께 갔는데 이번에 엄마가 따라갈까 라고 물었을 때 아이는 싫다고 한다. 야구 캠프가 좋았던 건 거기서 아빠랑 같이 놀고, 운동하고, 엄마의 간섭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런 아빠가 보고 싶고 그립고, 아빠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런 아빠에게 단 한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내쫓아버린 건 엄마인 것 같아 속이 상한다.
아빠가 엄마를 배신한 거지 나한테 잘못한 건 아니었잖아.
엄마가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줄 순 없었어?
엄마는 늘 바쁘다. 이혼 전에도 그랬고 이혼 후에도 그렇다. '너를 위해서, 너를 더 잘 키우려면 엄마도 엄마 일 열심히 해야 하니까' 라고 말하지만 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도 없고 같이 놀아본 적도 없는 아들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던 아빠가 보고싶다. 엄마와는 대화를 하더라도 결국 도덕선생님 같은 충고만 듣고 끝나니까, 아이는 그런 게 아니라 그저 함께 있어주고 함께 놀아주고 들어주기를 바랬는데 엄마는 이혼 후 아이가 바르지 못한 길로 갈까봐 늘 전전긍긍하다보니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기보다는 엄마 자신이 바라는 바를 가르치기에 바빴다.
그렇게 아들의 머릿속에 엄마는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 가득한 말을 하고, 과잉보호하고, 간섭하는 사람이라고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고, 준영이는 접근 금지 기간이 끝나고 다시 고산으로 돌아온 아빠와 다시 교류하게 되고 어느날, 아빠의 새아내 여다경을 만난다.
너희 엄마가 온갖 헛소문에 시달리면서도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건 너 때문이야.
그래서 말인데... 니가 아빠한테 오는 게 어때?
엄마는 의사선생님이니 고산을 떠나서 어디서라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야.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아빠도 너랑 살고 싶어하고.
(후략)
- <부부의 세계> 여다경 대사 -
이 말을 들은 아들은 흔들린다. 지선우에게 가족이라고는 아들 하나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아들이 엄마를 떠날 생각을 하냐고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많았지만 준영이는 겨우 15살, 몸은 컸지만 마음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평소 엄마와 솔직한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기에 다경의 말이 솔깃하게 들린다.
자신이 엄마의 행복을 막고 있는 건가 고민하고 그래서 아빠집에 가면 엄마는 홀가분해질 거라고 믿어버린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 한 켠에는 대화 안 통하는 엄마랑 있는 것보다 자신과 잘 놀아주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아빠랑 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준영이는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새엄마의 부모까지 사는 대저택에서 살게 되고, 아빠와 아줌마 (여다경) 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혼 직전 아빠가 엄마를 폭행했던 이유를 우연히 듣게 된다.
그 여자가 자기 아들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 한 거?
그거 당신 이기려고 그런 거야. 애 차지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부부의 세계> 여다경 대사 -
이 말을 듣고 준영이는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는다. 어른은 '엄마가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오죽하면 그랬겠나' 라고 생각하겠지만 미성년자인 준영이는 엄마가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지선우에게는 준영이밖에 없는데 어찌 아들놈이 여다경 말만 믿고 그리 엄마를 떠나냐며, 아들을 비난하지만 준영이는 자신도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직 덜 여문 15세 사춘기이고 그러기에 주변 사람의 말 한 마디에 쉽게 마음이 움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14회에서 지선우가 자살시도 중 김윤기에게 구조되어 병원에서 혼자 수액을 맞다가 갑자기 깨어나서 아들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극적 개연성이 조금 부족한 것을 모두 상쇄할 만큼 김희애의 모성 연기는 훌륭했고, 죽다 살아나서 갑자기 아들이 생각나서 전화기에 충전선을 꽂고, 아들에게 겨우 전화한 다음, 아들을 찾아 애타게 운전해서 가는 마음이 너무나 격하게 공감되었다.
그래, 그녀가 결국 끝까지 바닷물에 뛰어들지 못한 것도 엄마 없이 살아갈 아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17살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은 자기자신을 떠올리며 그녀는 그렇게 죽음은 문턱에서 다시 살아돌아왔기에 그런 다음 바로 아들에게 달려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준영이는 새로운 집에서 아빠와 새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그럭저럭 지내는 것 같았지만 여다경은 자신의 딸인 제니가 준영이와 함께 있다가 우는 소리가 들리자 '네가 제니 때렸니?' 라며 의심하고 무고한 의심에 상처받은 준영이는 '애가 혼자 놀다가 넘어진 걸 어쩌라고!' 라며 화를 낸다. 아빠 이태오조차 아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뺨을 때리고, 그 순간 엄마의 전화를 받은 그는 울먹이며 '엄마 진짜 미안한데 지금 나 좀 데리러 와주면 안 돼?' 라고 힘겹게 말한다.
에휴... 아이가 그 집에 자기 편 하나 없이 혼자 지내면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구구절절 이해되는 장면이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지선우가 제일 피해자이긴 하지만 그녀조차도 진정으로 준영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아들의 마음을 들어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이 준영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이혼 위기의 남편 앞에서 거짓연기를 하고, 경찰을 부르고, 심지어 학교폭력 피해 부모님 앞에서 무릎까지 꿇는다.
아들 때문에 무릎까지 꿇은 엄마를 보고도 반성하지 않는 준영이가 나빠 보일 수도 있지만 아이는 부모의 이혼, 아빠의 재혼, 그리고 다시 부모가 하룻밤을 보내는 모습까지 본 터라 그 나이에서는 세계관과 윤리관이 통째로 흔들렸을 것이다. 사춘기인 아이가 부디 감정의 폭풍을 잘 극복하고 엄마와 마음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선우에게 해주고 싶은 말.
애가 과자 좀 먹고, 학원 하루 빠진다고 큰일나지 않으니 그냥 아이가 방황하면 방황하는 대로 둬.
대신에 늘 곁에 엄마가 있다고, 니가 방황하고 돌아와도 엄마가 따뜻하게 안아줄 거라고 말해줘.
그러면 준영이도 엄마 마음 알고 다시 안정을 찾을 거야.
물론, 내가 아직 미취학 아동을 키우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많은 아이들의 사춘기를 겪어봤고 부모님들과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지만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은 다른 법이니까... 십년 쯤 뒤에 점꽁자매가 사춘기를 겪을 때 이 글을 보면 혼자 부끄러워서 이불킥 할 수도 있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뭐, 그렇다고...^^
* 사진은 부부의 세계 공식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