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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Jul 03. 2023

누가 죄인인가

[베트남전쟁 시민평화기록전] '기억 그 이후 당신은' 관람 후기

한국군에 의해 하미 마을이 학살을 당했다는 사실은 아직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http://www.kovietpeace.org/b/board15/7133) 베트남 정부에서 인정한 하미 마을의 희생자 숫자는 135명이다. 그리고 유족들 진술을 토대로 한베평화재단이 파악한 희생자 숫자는 150명(혹은 151명)이다.* 이 중에서 하미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어떤 문장일까.


*베트남전과 그때 일어난 학살에 대한 지식이 얕은 채로 전시를 관람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 알려주시면 겸허히 수정하겠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모르고 자라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그래서 쉽게 분통을 터뜨린다. 도대체 어떻게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일본 대다수의 국민이 ‘모를 수 있는지’, 가해의 역사는 전혀 가르치지 않으면서 원폭 이야기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 얼마나 가식적인지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할 때,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가해자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 사회에서 그때 한국군이 저지른 온갖 전쟁범죄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이 베트남전에 끌려가 온갖 피해를 입은 우리 군인들에 대한 슬픔보다 주류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지인 소개로 일본인 사진작가 무라야마 야스후미(https://www.instagram.com/murayama_journals/)의 한국 방문 시 수행통역을 하게 되면서였는데, 베트남의 참전군인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고 계셨다. 고엽제와 같은 단어며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배경 등을 처음 접하게 되어서 굉장히 당황하며 통역을 했던 기억이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범죄에 상당히 천착하고 계시던 작가다. 글을 쓰며 근황이 궁금해 sns를 검색해 보니 작년에 이에 대한 저서를 내셨다. 아마 여전히 그 관심사가 식지 않은 모양이다. 당시에는 이 열정이 좀 아니꼬웠다. 일본군의 범죄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는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군의 만행을 파헤친다는 것은 일정 부분 "너희도 똑같잖아."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아서. 애국심이 딱히 있는 편도 아니었는데, 그 통역 일정 내내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이 존재했다. 따로 해소할 방법이 없었고 고민을 나눌만한 공간도 없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은 작은 생선가시처럼 어디 한구석에 박힌 채 남았다.


그러다 졸업 이후에 한일 역사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 등에서 실무를 맡게 되었다. 덕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단지 한일 양국의 감정문제가 아닌, 보편적 시각에서의 전시성범죄로 바라보는 시각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아래층에서 베트남의 전시성범죄 피해자들에 대해 접하고 나니, 대학생 때 무라야마 씨를 보며 느꼈던 불편함이 조금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뿐, 여전히 저는 베트남전에서 벌어졌던 일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개인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실 지난 6월 28일 수요일 저녁에 피스모모의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전시기간이 연장된 베트남전쟁 시민평화기록전(http://www.kovietpeace.org/b/board15/7109)을 관람하러 갈 때도 이런 나의 배경 때문에 좀 멋쩍은 상태였다. 내용을 거의 모르고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무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도록 한베평화재단의 활동가 아침님과 라니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전시 전체에 대해 아침님이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베트남 전쟁 중 일어났던 한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 그중에서도 피해로 인정받고 있지 못한 하미마을에 대한 전시였다.  들어서자마자 순서대로 아픔의 자리(피해자 당티카의 사진과 영상), 애도의 자리(하미 위령비, 희생자 명부, 비문과 이 비문을 덮은 연꽃), 환대의 자리(피해자 고 팜티호아의 유품, 사진), 요구의 자리(<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들), 희망의 자리(하미 연꽃비문 퍼즐, 하미학살과 평화 연대기,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서하사의 의자) 등이 놓여 있었다. 안에서는 하미마을을 방문했던 김창섭, 박상환, 이동석 세 작가분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하미 마을 학살로 인해 친인척을 대부분 잃고 고통스럽게 자랐다는 당티카는 매년 위령제에 참석하여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것처럼 우신다고 한다. 고통스러워서 위령제에 늦게 참가하시기도 하신다고. 영상을 통해 보는데, 보는 사람도 괴로워질 정도로 온몸으로 우는 모습이 너무 속상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이런 자리에서 우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어서 한참 눈알을 굴리면서 간신히 참았다. 시작부터 위기 더니, 비석 앞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읽을 때는 목이 메어서 못 읽을 뻔했다. (다행히 같이 가신 활동가 분들이 읽는 동안 혼자 속으로 목을 가다듬고 멀쩡한 목소리로 읽을 수 있었다.)


비석의 내용을 대사관 분이 지적하는 바람에 연꽃모양 대리석이 덮였다는 설명을 들으면서는 답사를 다니면서 봤던 두 가지 사례가 떠올랐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있는 '일제 강제징용 사죄비'를 멋대로 훼손하여 '위령비'로 바꿨던 사건(https://m.khan.co.kr/local/Chungnam/article/201704131809011#c2b)과 경찰에 의해 한차례 훼손되었던 백조일손지묘의 비석(https://www.jejudarktours.org/ko/historical-sites/%EB%B0%B1%EC%A1%B0%EC%9D%BC%EC%86%90%EC%A7%80%EC%A7%80/)이 그것이다. 두 경우 모두 훼손된 비석과 원래 뜻대로 복원한 비석을 함께 전시해 둔 상태다. 훼손하려는 시도 자체도 역사에 남겨 보는 사람에게 평가를 맡기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어떤 일을 겪고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너는 피해자가 아니다.',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다른 사람들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지 마라.' 이런 공격들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고, 그들이 자신의 고통을 마음껏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지원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특히 그렇다. 하미마을의 위령비도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되어 원래 모습을 찾게 될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베트남의 국제관계 속에서의 위치나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 길이 정말 쉽지 않아 보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지난 5월 24일(수)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신청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겠다는 각하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이후 5월 30일(월) 각하 이유를 담은 결정서를 신청인들의 대리인에게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진실화해위의 조사대상이 “외국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전쟁 시에 발생한 사건으로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 & 응우옌티탄 외 4명의 진실화해위 진실규명신청사건 대리인 일동] 입장문


모국이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러한 가해 사실을 접할 때 대체로 불편감을 느끼는 지점은 이런 것들인 것 같다: 그때 참전한 '용사'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폄훼를 해? 전쟁이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닐까? 베트콩을 소탕하려다가 부수적으로 일어난 피해일 뿐이야. 그걸 왜 한국에서 조사까지 해줘야 해?


참전한 분들을 악마화하고 비난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에게도 복잡한 서사가 있으니까. 전쟁이니까 범죄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그런 가해를 강요하는 상황=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극한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베트콩을 소탕하려다가 일어난 부수적인 피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글쎄. 베트콩은 막 죽여도 되나? 베트콩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노인과 여성, 아이들(하미마을의 135명의 피해자 중 성인은 60명 밖에 되지 않고, 총을 들 수 있을 정도의 연령의 남성은 세 명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밖에 없었던 마을을 몰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나? 온갖 잔인한 성범죄가 일어났던 것은 또 어떤가?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이 분명히 일어났음에도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돌아가시기 시작한 지금도 계속 인정하지 않고 있는 한국의 태도는 이 가해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생각의 흐름의 끝에는 이런 질문이 생겨난다. 너무 고통스럽고, 마음 아픈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알겠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한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마음 아프고 미안해해야 하나? 그래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나?


함께 전시를 방문한 활동가들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을 대표해 사죄를 할 권리도 책임도 없기는 하지 않을까? 하지만 베트남전에 파병을 나간 군인들 덕분에 한국사회가 누리게 되었던 것들이 분명히 있고,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이 저지른 것에 대해서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우리가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특별할 것은 없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실을 밝힐 것, 사과할 것, 정확한 주체가 정당한 배상/보상을 할 것, 이러한 사실들을 국제사회와 국민들에게 앞으로도 널리 알릴 것.


요즘 우리 사회는 '가해자'에게 상당히 가혹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와는 다르다며 선을 그어 악마화시켜버리고, 혀를 끌끌 차며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랬다."며 비난하고 모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사이다 감성'이라며 치켜세운다. 죄질 불문하고 끝까지 부정했을 때 법적으로 유리하다는 식의 이야기도 넘쳐난다. 이런 사회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잘못도 그러할 텐데, 국가의 잘못 차원으로 가버리면 정말 남의 일 같고 관심도 없어진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필요한 만큼 사죄를 하고, 피해에 대한 보상/배상을 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모든 후속 조치를 취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다. 스스로의 불편함을 마주하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과 싸워 이겨야 한다. 당시의 참전군인들이라면 하미마을에 대해서 증언을 해주는 것으로 연대할 수 있을 거고. 전혀 상관없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은) 우리들은 함께 주변에 널리 알리고,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국가에 잘못을 인정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겠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함께 해주세요. 한베평화재단의 링크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https://online.mrm.or.kr/T3GroFk

(2024.5.15.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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