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대학원을 가려고 하든 일을 하려고 하든 관심사를 좁혀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그 모든 문제를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평화를 보는 눈'이라는 책을 읽으며 꼭 그렇지만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 평화, 폭력을 확장해야 보인다', '2.평화는 공허한 구호인가', '3. 평화의 관심사는 관계와 공동체', '4.평화는 정의를 외면하는가'의 4개 장에서는 평화에 대한 개념적인 설명을 하고, 이후 4개의 장에서는 국가폭력, 전쟁, 빈곤, 기후변화를 평화와 연관지어 다룬다. 마지막 4개의 장에서는 평화를 실천하는 과정과 방법으로 비폭력, 갈등, 용서와 화해, 평화교육에 대해 다루고, 마지막 장에서는 평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겸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마무리를 짓는다.
평화를 보는 눈- 폭력없는 세상은 가능할까
평화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이 죄다 어려워서 시무룩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이 책을 접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편안하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들이 마음에 들었다.
평화와 폭력이란 무엇일까
평화란 폭력이 없는 상태다. 평화학에서 폭력은 크게 직접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으로 나뉜다. 직접적 폭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폭력의 범주와 비슷하게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구조적 폭력은 가족, 국가, 국제사회 등으로 구성된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누군가를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 폭력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해서 가해지는 폭력이다.
직접적 폭력이 없는 낮은 수준의 평화는 소극적인 평화라고, 구조적/문화적 폭력까지 제거된 상태는 적극적 평화라고 한다.
책에서는 다양한 예시를 통해서 폭력과 평화에 대해서 설명을 했지만, 내 경우에는 평화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강의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용어들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일본의 헌법 9조 개헌 논란 당시에 이 문제를 둘러싼 여러 관점을 설명하는 강의였다.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군대를 키워 힘을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면 전쟁이라는 직접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구조적 폭력은 그대로 두고 직접적 폭력만을 피하는 소극적인 평화 상태다. 정말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군을 유지하며 소극적 평화 상태를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에는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게 만들어 조금 더 높은 수준의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주변국들이 군대를 보유하고 계속 키워나가고 있는 상황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고, 자위권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쉽기 때문에 개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아직도 진행중인 문제기는 하지만) 그게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평화라는 것을 한 국가에만 강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강의였다.
그렇다면 일본의 입장도 이해한다는 이유로 주변국가들이 일본의 헌법 개헌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어 가해자를 아예 배제시키거나, 가해자에게 '평화'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것이 평화적인 해결책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가해를 저지른 주체가 피해자와 같은 취급을 받을 수도 없다. 강의를 들은 이후로도 그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을 해왔는데, 4장에서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폭력의 상황에는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고.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실제로 내가 활동하고 있는 평화 단체의 대부분은 역사학자, 역사교사 등 역사에 관련된 분들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역사 일변도라 평화 자체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지만, 이 책을 읽다보니 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의 문제들과 평화를 연결짓기
이 책에서는 국가의 폭력과 한반도 분단 현실 , 빈곤, 기후변화라는 네 가지 문제를 구체적인 예시로 들어 한장씩 다뤘다. 국가의 폭력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절차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 기억에 남았다. 빈곤은 그 자체로 폭력은 아닐지는 몰라도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후변화는 부유한 국가들이 저지르는 환경오염이 빈곤한 국가들에게, 그리고 약자들에게 그 짐을 지우고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평화학에서 꼭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최근에 돌봄노동과 아동학대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 책들에 대한 독후감을 평화를 주제로 다루고자 한 브런치에 쓰는 것이 맞는 지 고민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직접 그 주제들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맥락상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또 그 자체로 폭력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지치고 폭력적이 되도록 내모는 구조라면 이 역시 문제다. 사회의 문제를 약자들에게 짐을 지운다면 그것 또한 폭력이다. 시간이 날 때 최근에 읽은 책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글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평화 만들기
비폭력을 논할 때면 마하트마 간디의 예시가 빠지지를 않는다. 두들겨 맞고, 죽어가나가면서도 원칙적인 비폭력을 고집하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방법이며, 결코 비겁한 자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되도록 비폭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과 달리 원칙적으로 폭력을 거부하는 일은 사실 현실적으로 쉬운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 목숨과 삶이 위협받고 있는 와중에도 이를 대갚음 하지 않는 것이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할까?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는 했다.
최근 미얀마나 홍콩 사태만 해도 그렇다. 대항하는 입장에서 비폭력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 문화/구조/직접적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 고쳐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또다른 폭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더 큰 폭력에 맞서기 위한 폭력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맥락과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일 것 같다.
평화를 위한 단계로 이 책에서는 갈등-물론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대화를 전제로 한-과 용서, 참회, 화해, 그리고 공존을 이야기한다. 갈등을 무조건 봉합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하나의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보고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이 갔다.
평화적 공존을 위한 틀로 세가지 방법이 소개되었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틀, 현재-미래-과거로 이어지는 틀, 미래-현재-과거의 순으로 문제를 다루는 틀. 가장 일반적으로는 역사 갈등을 해결하고, 현재의 상처를 봉합한 뒤 미래의 공존을 논하지만, 당장 생존의 문제가 시급한 경우 현재의 문제를 우선하여 다루고 과거의 문제를 맨 마지막에 다루는 틀도 있고, 혹은 미래의 공존을 먼저 준비하며 차근차근 현재와 과거를 다뤄가는 방법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주 신선했다.
세 방법 모두 화해가 필요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과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문제를 먼저 다루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이 장을 읽으며 생각이 좀 바뀌었다. 확실히 어떤 갈등의 골이 너무 깊은 경우에는 화해에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게 마련이다. 그 시간 내내 문제를 방치해두면 해결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고만 있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어느 틀을 우선으로 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선택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 굉장히 좋아보였다.
평화교육
나는 평화교육을 다루고 있는 피스모모라는 단체의 학습회에 종종 참여한다. 2017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에서 진행했던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에서 해주었던 평화교육이 너무 인상깊었기 때문에 후원을 시작한 참이다. 평화감수성을 키우고, 교육자들이 평화를 강요하는 대신 수업을 듣는 주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수업 방식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며 늘 많이 배우고 느낀다.
요즘같은 시대에는 정말 평화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고, 뭐가 문제인지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넘쳐나는 이런 시대가 계속 된다면 반목의 골이 깊어지기만 할테니까. 스스로 평화교육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평화교육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작은 위안을 얻곤 했다.
평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
마지막 장에서는 주로 평화학 학자 겸 실천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마무리가 지어졌다.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다. 역사/평화/시민운동을 하면서 많이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운동의 영역조차도 너무 학자들 위주로만 굴러가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꼭 전공을 하고 학문으로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이들만이 평화를 업으로 할 수 있을까? 대학원을 가고 논문을 쓰지 않더라도 평화를 업으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입장에서는 속시원한 답을 주는 장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 가야 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5년뒤, 10년뒤에는 저 자신이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평화 활동을 끌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고민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