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부추기는 사회, 게임 부추기는 사회
보드게임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와 한번 부딪힌 적이 있다. 처음 해 보는 보드게임을 설명하면서 "처음 해보는 데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해력이 좋다."는 등의 칭찬을 듣다가 무언가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서다. 친구들을 독려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갔으나, 쉬기 위해 하는 게임에서 조차 '경쟁'하고 '판단'당해야 한다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혹시 나 모르게 내가 이해력이 좋지 않다고 판단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게임을 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일까? 그런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나는 게임을 잘하는 것은 게임을 잘하는 것일 뿐 그것을 가지고 '머리가 좋다.'는 등의 판단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잘 전달된 것 같지는 않은 느낌으로 대화는 끝났다.
살다 보면 어쨌든 여러 종류의 판단을 하게 된다. 판단을 하지 않고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라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자기 생각과 주관을 가지지 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 생각에 판단에는 종류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주관에 따라 갈래를 나누고 분류하는 판단과 이른바 '급'을 나누거나 좋고 나쁨을 나누는 '판단' 말이다. 전자는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후자의 판단은 '급이 떨어지는 쪽, 혹은 나쁜 쪽'에게 뭔가 불이익이 닥칠 수 있는 위험의 단초가 되곤 한다.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게 말로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지. 게다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네가 틀렸다'는 판단의 말처럼 들린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도 고민이 많았다. 결국 그가 이해한 방식도 '자기 머리 나쁘다는 말 듣기 싫다는 거 아니야?'가 될까 봐 걱정스러웠고. 이래저래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답답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든 생각은, 그 두루뭉술함과 답답함 자체가 평화와 다양성의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친구에게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이 내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 않은가. 그걸 강요할 수도 없으니 딱 적당한 수준에서 의견피력을 하고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평화와 다양성, 공존의 길은 상당히 복잡하고 꼬여있다. 정답이라고 할 것이 없다.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진행되었던 '평화교육진행자되기 입문과정'에서 처음으로 한 가지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을 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짧게 나누는 과정 속에서 짧은 질문을 던졌는데, 누군가가 내가 생각했던 것에 의도에 딱 맞는 대답을 꺼내놓았을 때 나도 모르게 외쳤다. 정답이라고. 그 직후에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답, 정답이라니. 평화교육에서?
그날 프로그램이 끝난 뒤 피드백을 할 때 그래서 자진납세로 내 언어가 부적절했음을 밝혔다. 정답이라는 언어가 부적절했어요. 정답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기획의도에 가장 가까운 말이었어요'라던가, 대체할만한 언어가 얼마든지 있었고, 사실 그걸 맞추게 하기보다는 열어놓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질문자체가 좋지 않았어요. 다들 정답이라는 내 말을 못 듣고 넘어갔다고 했지만 내 안에는 그것이 깊이 남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답을 맞혔음을 칭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정답이 있는 교육을 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너는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라는 언어 사용이 가져오는 경쟁심리와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되고, 초조하게 만드는 심리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북유럽의 [얀테의 법칙] 같은 것이 가져오는 장점이 분명히 있겠다. 물론 100프로 동의하기는 어려우나......
<얀테의 법칙>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확신하지 마라
5.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구든 당신한테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10.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애초에 경쟁하게 만들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문화적 배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경쟁하는 보드게임을 아예 다 보이콧하겠다는 거냐? 고 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아직 내가 보드게임이 갖는 문화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을 깊게 해보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게임에서 갖게 되는 경쟁심리가 사회에서 갖게 되는 경쟁심리와 딱 연결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 짝꿍은 게임을 할 때에도 죽자 사자 게임을 한다. 지면 뭔가 중요한 것을 잃는 것처럼. 나 역시 승부욕이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게임을 하지는 않는 편이고 지더라도 금세 넘어가는 편이다. 짝꿍은 경쟁과 판단이 강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나는 그런 문화가 약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나는 그런 사회문화적 배경이 게임에도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인이 게임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퍼져있고 이를 뒷받침할 실력이 따라오는 것 또한 사회적으로 경쟁이 심한 사회인 것임이 한몫하지 않을까.
쉬는 날, 머리 한편을 괴롭히는 생각을 정리한 조각글 한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