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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교육시수


월요일 1교시 주말 이야기 발표를 시작했다.

벚꽃이 만발한 계절이라 아이들은 제각기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왔다. 공원에서 산책한 아이, 가족들과 캠핑을 다녀온 아이, 조금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아이 등 핑크빛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주말에 아빠가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화를 내고 다른 집으로 갔습니다.”

준기의 발표로 핑크빛 교실은 갑자기 회색빛 교실로 변했다. 아! 준기 아부지! 원망스럽다. 술을 많이 드신 것까지는 좋은데 왜 화를 내셨을까. 얼굴 한 번 뵙지 못한 준기 아버지께 내가 화를 내고 싶어졌다. 화를 내고 다른 집으로 갔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휴. 일단 너무 멀리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술 이야기만 간단하게 끝내자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얘들아, 어른들은 왜 술을 마시는 것일까?”

나는 마치 술을 한 방울도 마신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이들에게 물었다.

“음. 맛있어서?”

“선생님이 술 마셔봤는데 그거 엄청 써.”

“음.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서?”

“맞아. 치맥같이 음식을 먹으면 같이 어울리는 음식이 있기도 해.”

“음. 스트레스 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누가 주는 걸까?”


나의 질문에 어떤 아이는 회사라고 답했고, 어떤 아이는 본인라고 했다. 진짜 자식들이 말을 안 들어서 술을 마시는 부모님들이 있냐고 물었더니 열 명쯤 넘는 애들이 자기들이 말을 안 들어서 부모님들이 술을 먹는 것이라고 실토(?) 했다. (순순히 자백하는 모습이 꽤 귀엽다.)

술을 먹으면 잠깐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진짜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저 때문에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요.”

“맞아요. 우리 아빠도 그래요. 몰래 피우다가 맨날 걸려요.”

오잉? 역시 술과 담배는 짝꿍이었던가. 우리 반 버스는 약물(?) 오남용 예방교육 정거장을 지나 이윽고 흡연 예방 교육 정거장에 도착했다.

“얘들아, 그럼 부모님들은 담배를 왜 피우시는 걸까?”

“그것도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몸에 좋지 않은 담배를 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없어요 없어! 진짜 없어요.”

야무진 은서는 득도한 도사님의 표정으로 오른쪽 검지를 세워 흔들며 말했다.

“은서야 왜 방법이 없어?”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엄청 많이 이야기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제가 담배 끊으라고 말하면 이제 저를 막 혼내요.”

“에고, 우리 은서 아빠 건강 생각해서 말씀드린 건데 많이 속상했겠다.”

“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는 중독이 돼서 그런 거래요.”


중독이라는 단어 앞에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흡연 예방 교육을 잘 받아온 덕택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얘들아 중독이라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부탁해도 들어줄 수 없으니 얼마나 무서운 거야. 그치?”

“네.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시작도 하지 않으면 좋겠다. 알겠지?”

“네.”

맙소사. 주말 이야기로 시작한 근황 토크(?)는 중독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는 시간으로 알차게 사용되고 말았다. (오늘도 혼자 뿌듯함.)


교사들은 약 10년 전부터 교육과정에 법정교육시수를 배정하느라 고생하고 있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2월에는 교육과정 재구성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연간 시수표, 진도표에 작은 글씨로 몇백 시간의 법정교육시수를 계획해서 넣어야 한다. 몇 백 시간을 파일에 넣으려니 글씨는 계속 더 작아지고 한글 파일의 표는 더없이 비좁아진다. 시작도 하기 전에 교육과정 수정본을 몇 개씩 만들어내는 교사들은 이놈의(?) 법정교육시수 때문에 아이들 만나기 전에 힘이 다 빠진다고 한다. 법정교육시수나 그것을 교육과정에 기록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교사는 없다. 단, 조금 더 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쏟기 위하여 간소화된 시스템이 간절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교육과정 파일 속 법정교육시수가 아니라 실제로 교육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역량 강화도 중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교육과정 파일 속에 깨알같이 들어가 있는 안전교육, 약물예방교육, 흡연 예방 교육이 전부가 아니다. 교실 속 상황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교사들은 그 이상의 법정 교육 시수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법정교육시수에 심하게 집착(?) 하시는 분들에게 한마디 드리고 싶다. (심하게 집착하지 않으신다면 ‘해당 없음’이니 안심하세요.)


법정교육시수 걱정하시는 분들! 걱정하지 마세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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