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중심축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안방으로 옮겨진 건 약 10년 전이었다.
외할머니가 댁에서 의자에 올라가 찻잔을 꺼내시려다가 떨어져 다치시는 사고를 겪으신 후, 엄마의 마음에는 늘 불안함이 안개처럼 끼어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살기로 했다.
그날 이후, 집안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80대 노부부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부모님은 원래 쓰시던 가장 넓고 쾌적한 안방을 할머니, 할아버지께 기꺼이 양보하셨다.
60대 부부의 거처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으로 바뀌었고, 원래 그 작은 방을 쓰던 둘째는 내 방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이사하면서 내 방을 다시 갖게 되어 기뻤는데, 2년 만에 다시 동생과 같이 방을 쓰게 되서 착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의 작은 방은 말 그대로 '비좁은 사랑'의 아지트였다. 아빠는 좁은 틈에서 컴퓨터로 업무 관련 일을 하셨고, 엄마는 조그만 테이블 하나를 놓고 책을 읽거나 성당 교육과 관련된 공부를 이어갔다. 우리집 귀염둥이 뽀송이까지 아빠 곁에 있겠다며 자기의 주거처를 그 방으로 옮긴 탓에 안그래도 작아진 부모님의 방은 강아지 방석과 용품들로 더 좁아졌다. 킹 사이즈도 아닌 퀸 사이즈의 침대에서 아빠, 엄마, 강아지까지 셋이 잠을 잤다. 조금은 불편하고 옹색했지만 그것은 우리 가족이 노부부를 위해 기꺼이 선택한 다정한 배려였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신여성'이었다.
대학을 나온 커리어우먼이었고, 7~80대에 주민복지센터 등에서 진행한 실버교육프로그램에서 배운 컴퓨터 프로그램 기술로 가족 사진을 근사하게 편집해서 직접 카톡으로 가족 단톡방에 공유해 주시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내게는 큰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총명함을 잃지 않던 할머니가 조금씩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의, 어느 고열이 가득한 밤이었다.
단순한 감기에 걸리신 줄 알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덮고 계시던 꽃무늬가 수놓아진 이불을 부드럽게 쓰다듬으시며 "이 꽃으로 화장품을 만들면 참 좋겠다."라고 중얼거리셨을 때, 전기장판 온도 조절기를 시계처럼 바라보며 "이제 곧 엄마가 성당에서 올 시간이네."라며 나를 쳐다보셨을 때 순간 이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증상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뇌경색 등 뇌에 관련된 질환들이 나오길래, 검색 결과에서 본 대로 할머니께 종이와 펜을 가져다 드리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 엄마랑 삼촌들 이름 한 번 써 보세요."
늘 마우스를 거침없이 움직이며 포토샵을 하시고, 다이어리에 본인 일정을 꼼꼼하게 작성하시던 할머니의 손이 하얀 종이 위에서 길을 잃고 멈춰버렸다.
그날 할머니는 끝내 자식들의 이름을 적지 못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어렴풋이 직감했다.
우리를 지탱하던 거대한 기둥 하나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음을.
떨리는 목소리로 119에 신고를 했고, 할머니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의 불빛 속으로 실려 가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전과는 다른, 아주 길고도 낯선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