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60, 30, 20 : 다섯 식구가 사는 법

네 개의 시차가 공존하는 집

by 오르민

할아버지의 시계는 멈췄지만, 남은 다섯 식구의 시계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전보다 더 분주하게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집안의 풍경은 박제된 듯 그대로였다. 우리는 가구 하나 옮기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계시던 자리를 서둘러 정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간이 정지해 있을수록 그 안을 채우는 우리의 시간은 치열해졌다. 집안의 균형을 잡던 묵직한 추가 사라지자, 할머니를 지탱해야 하는 몫이 남겨진 우리에게 오롯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우리는 '책임'이라는 새로운 태엽을 감아야 했다.


효율보다 앞선 ‘예우’의 공간

우리 집의 공간 배치는 효율보다는 늘 ‘예우’가 우선이었다.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할머니가 가장 넓고 쾌적한 안방과 큰 화장실을 그대로 쓰실 수 있게 배려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딸의 입장에서 ‘이제는 안방을 부모님이 쓰셔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하던 나와 달리, 부모님은 할머니 입장을 더 배려하셨다.


나의 계속된 권유에도 60대 부부는 기꺼이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을 고수하셨고, 그 생활은 무려 5년이나 이어졌다. 부모님의 다정하면서도 희생적인 배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르는 네 개의 시계가 기묘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전 3시 : 90대의 느릿하고 혼란스러운 태엽

가장 먼저 깨어나는 건 역시 90대 할머니의 시간이다. 할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새벽녘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홀연히 일어나셨다. 자꾸만 누군가 집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안방 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향해 “거기 누구야!” 하고 소리치신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우리 집의 하루는 남들보다 훨씬 일찍 막을 올린다.


오전 4시 : 끼여버린 태엽, 60대의 묵직한 도리

할머니의 섬망 증상은 60대 부모님의 시간을 앞당겨 놓았다.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도 할머니가 안방 문을 여는 미세한 소리만 들리면, 엄마는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신다. 당황한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꿈을 꾸신 것이니 더 주무시라”며 다독이는 것은 엄마의 몫이다.


아빠 역시 그 소리에 잠을 깨고, 안방 침대 한복판에 끼어 자던 우리집 귀염둥이 강아지 뽀송이도 덩달아 눈을 뜬다. 이미 잠은 저만치 달아나버려, 다시 눈을 붙이기엔 새벽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부모님은 본인들의 피로를 ‘자식 된 도리’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갈무리하며 남들보다 긴 하루를 시작한다. 60대의 시간은 늘 그렇게 고단하고도 묵직하다.


오전 7시 : 30대와 20대의 치열한 초침

해가 뜨면 이제 거실 화장실을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안방 화장실이 할머니의 전유물이 된 순간부터, 남은 네 식구는 현관 앞 작은 화장실 하나를 나눠 써야 했다.


“화장실에서 언제 나와?”

“나 방금 들어왔어!”


출근 시간이 고정적인 나와 아빠, 그리고 주 3회 오전 수업이 있는 20대 동생의 동선이 겹치는 날이면 화장실 문앞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 옹색하고도 치열한 ‘화장실 눈치 게임’은 우리가 선택한 예우에 따르는 기꺼운 대가였다.


밤 8시 : 네 개의 숫자가 만나는 거실

퇴근 후 정적이 필요한 손녀들과 달리, 90대는 진짜 하루는 이제 시작이다. 백 번 넘게 반복된 옛날 이야기와 이해가 도통 가지 않는, 두서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참다못한 손녀들이 "그만 좀 하세요!"라며 날을 세우면, 엄마가 부지런히 그 사이를 오가며 대화의 온도를 조절한다.


하지만 효녀인 엄마마저 "엄마, 고집 그만 부려! 그만해!"라며 비명을 지르는 날이면, 아빠가 조용히 나서서 TV 채널을 돌리거나 할머니의 간식을 챙기며 얼어붙은 거실을 녹인다. 90, 60, 30, 20. 이 기묘한 숫자들은 매일 밤 충돌하고 화해하며 기어이 함께 저물어간다.


90, 60, 30, 20.

숫자의 간격만큼이나 서로의 속도는 너무나 달라서 가끔은 태엽이 엉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누군가의 넓은 안방을 위해 누군가가 작은 방을 견디고, 누군가의 여유를 위해 누군가가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 불협화음이야말로, 우리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속도로, 그러나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전 03화나란히 돌던 시계 하나가 멈췄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