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을 놈이 보낸 문자
주말 아침. 부지런히 집안일을 해치우곤 남편과 꾸러기를 데리고 아파트 단지를 서너 바퀴 천천히 돌았다. 제법 따듯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바람도 살랑이니 곧장 들어가기 아쉽다. 시원한 커피를 사들고 벤치에 앉아서 느긋하게 이른 봄햇살을 즐겼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 덕에 여유로운 오후시간이 주어졌다. 엄마를 보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점심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엄마와 차 한잔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친정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를 본 엄마 아빠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핸드폰을 들이미시는 게 아닌가?
"네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안 보여."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찰나에 느껴진 싸한 기운에 말을 맺지도 못하고 엄마의 핸드폰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문자가 왔다.
"엄마~ 하고 있어? 설치 눌렀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스크롤을 올려보니 어떤 놈이 나를 사칭해 엄마에게 무슨 앱을 깔게 하고는 화면에 보이는 숫자를 알려달란다. 핸드폰 터치가 안 돼서 전화번호를 변경했다는 둥 통화는 안된다는 둥 핸드폰이 망가져서 파손보험을 신청해야 한다는 둥.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해대며...
이 XXX!!
몇 년 만에, 그것도 엄마 아빠 앞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에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니 당신네 딸이 이런 허랑방탕한 문자를 보낼 리 없지 않으냐고!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해봤어야지 이걸 당하고 있느냐고!
엄마 아빠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린다. 망연자실한 듯한 두 분의 모습을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떨쳐내 본다. 침착해야 한다. 제발 침착하자...
우선 횡설수설하는 두 분을 진정시키고 문자를 받은 후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여쭸다. 엄마는 문자를 받고 내가, 아니 이 "썩을 놈"이 하라는 대로 링크를 클릭해 앱을 깔았다고 한다. 또 하라는 대로 앱을 클릭해서 보이는 숫자를 알려주려고 했는데, 숫자가 바로 안 보이더란다. 그래서 아빠랑 합심해 이것저것 눌러보던 차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홈 화면을 보니 "QuickSupport"라는 앱이 깔려있었다. 처음 보는 앱이지만 대충 봐도 원격제어 앱이다. 문자 온 시간을 보니 엄마가 이 앱을 깐진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띠링.
"엄마 답장해 줘~"
또 그놈이다! 채근하는 걸 보니 아직 늦지 않았구나 싶었다. 우선 이놈을 붙들어둘 요량으로 “잠깐만”이라고 답장을 하면서 동시에 내 핸드폰으로 경찰서에 신고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친절한 안내에 따라 엄마가 거래하는 모든 금융기관에 연락해 사고처리접수를 하고 지급정지 신청을 했다. 은행 상담직원과의 연결이 쉽지 않아 애가 탔는데, 경찰서에 전화해 요청을 하니 바로바로 연결을 해주신다. 엄마 핸드폰에 떡하니 원격제어가 가능한 앱이 깔려있으니 어찌나 마음이 급하던지... 그 바쁜 분들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 본인이 아닌 딸의 핸드폰으로 사고신고를 하다 보니 은행마다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상담직원의 안내에 따라 엄마를 바꿨다가 다시 내가 받았다 하면서 마음이 더 급해진 우리는 결국 스피커 폰을 켜고 동시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계셨다. 약속이 있다고 하셨다. 이미 머리를 맞대고 한 몸을 이루고 있던 엄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냥 나가시라고 외쳤다. 나는 아빠까지 챙길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는 아마 비자금이 들통날까 걱정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엄마와 한 몸 한뜻으로 신속하게 전자뱅킹을 해지하고 인증서, 보안카드, OTP까지 다 폐기해 버렸다. 오늘자로 확인되는 거래내역은 없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같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엄마는 통장이 참 많았다. 직접 은행 앱을 설치해 드리고 인터넷 뱅킹을 알려드리긴 했었지만, 일흔이 넘은 엄마가 오픈뱅킹까지 하며 그 많은 통장을 관리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다. 돈관리를 야무지게 잘하시는구나 싶어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엄마에게 엄지 척을 날려본다.
모든 안전조치를 마치고 문제의 앱과 금융거래앱을 모두 삭제했다. 월요일 아침에 핸드폰 A/S센터를 방문해 공장초기화를 진행한 뒤에, 주거래 은행에 방문해 지급정지를 해지하고 전자뱅킹에 재가입하시라고 찬찬히 설명해 드렸다. 엄마는 A/S센터와 주거래 은행 본점위치까지 꼼꼼히 파악해 두신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엄마가 며칠간 상당히 귀찮아지겠구나 싶어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 와중에도 그놈은 계속 문자를 보냈다.
지가 울긴 왜 울어! 욕지거리를 뱉어줄까, 아니면 골탕을 좀 먹여줄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었다. 이놈을 상대하는 건 훌륭한 경찰분들이 해주실 일이고, 엄마가 불편하지 않게 챙겨드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일 테니. 커피 한잔을 놓고 괜히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 재잘거려 본다. 많이 놀랐을 엄마 마음을 똑똑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뻔했네 싶다가도 조금만 빨리 갔어도 엄마가 귀찮을 일은 없었을 텐데 싶어 여전히 요동치는 마음이라니. 찬찬히 걸으며 그래도 이만하면 잘 대응했다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만간 다시 들러서 필요한 앱을 설치해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