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기억하는 우리의 얼굴이 다르지 않기를
20년 전의 이른 봄날, 이제 막 앳된 티를 벗어낸 젊은 남녀가 지하철에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두 바퀴를 돈 후였다. 다음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그들은 왠지 불안해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된 날이었다. 둘은 아침 일찍 만나 함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도, 데면데면한 선후배들도 새로 생긴 파스타집으로 몰려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둘은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저녁 어스름이 질 때까지 화창한 봄날의 캠퍼스를 함께 누볐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도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하는 시간은 늘 앞서 달리니 내릴 역을 지나쳐 한 바퀴를 도는 것쯤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두 바퀴나 돌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 시간 반전에 내리려는 여학생을 남학생이 붙들었다. 헤어지기 아쉽다는 뜻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남자친구의 태도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몇 정거장이 지났을 때 그가 손을 잡아끌더니 빈자리에 앉혔다.
"나 안 앉아도 되는데?"
"한참 서있었으니까 앉아서 가."
남자친구는 이제 불안해 보였다. 계속 두리번거리며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곧 여학생 옆에 앉아있던 승객이 내렸고 둘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2호선이 또 한 바퀴를 돌았을 무렵, 남학생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금 네 머리 위에 한라봉 박스가 있어. 어떤 아저씨가 들고 타시는 걸 봤는데 잊어버리고 두고 내리셨어. 그때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이제 다 내렸어."
위를 올려다보니 바로 위 짐칸에 한라봉 박스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당시 한라봉은 귀한 과일이었다. 한라봉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여학생이 물었다.
"한라봉이 그렇게 맛있어?"
"엄청 맛있어. 귤이랑은 달라."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아마도 가족들과 나눠 먹으려고 했을 이 값비싼 과일을 잃어버렸으니, 그 아저씨는 얼마나 속이 상할까. 분실물센터에 가져다주자고 얘기할까 싶다가도 한라봉이 탐이 났다. 배도 고팠다.
둘은 다음역에서 내렸다. 손을 꼭 잡고 입은 꾹 다문채 걸음을 재촉했다. 남학생의 겨드랑이에는 한라봉박스가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역사밖으로 나와서야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대에 부푼 여학생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박스를 열었을 때, 둘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한라봉박스에는 온갖 쓰레기가 담겨있었다. 그 아저씨는 잊어버리고 한라봉박스를 두고 내리신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라봉을 먹다가 20년 전 기억에 실없이 웃어본다. 그 박스에 한라봉이 잔뜩 들어있었다면, 그날 우리는 더 행복했을까? 확실한 건 그날 한라봉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는 기억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언제든 한라봉을 먹을 수 있지만 내입에 썩 맛있게 느껴지지 않아 잘 찾지 않는다. 껍질이 두꺼워 번거로운 데다 금방 음식물 쓰레기가 쌓이니 귤이 더 좋다. 참 다행이다. 단지 귀한 과일이라 탐을 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도 즐거운 기억으로 반추할 수 있으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남학생도 한라봉을 먹으며 그날을 떠올리겠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와 나의 기억이 꼭 같았으면... 그래서 그도 한 번씩, 실없이 웃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