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내고 밥 먹는데 왜 감사하죠?

AI 시대, 이제는 공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

by 올바른

영상 속 어머니가 서빙하는 종업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아이는 '돈 내고 먹는데 왜 감사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종업원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는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가지고 언쟁을 벌였다.

위 내용은 애니메이션 유튜브 채널 사우스코리아파크'외식'이라는 영상의 내용이다.

한때 나는 영상 속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어제의 나는 서빙 로봇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감사한 거 아닌가?"

어릴 때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다가 성적이 오르면 나는 선생님에게 감사 표시를 하곤 했다. 인사를 드리기도 하고 선물을 드리기도 하고 감사함을 기반으로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별 생각이 없다가 문득 나는 진정 감사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기분을 내는 김 부장처럼 나는 감사한 게 아니라 감사한 기분을 내는 건 아닐까?

나는 큰 도움을 받았고 선생님도 수고를 했고 감사 인사를 하면 나도 기분이 뿌듯하고 좋으니까. 그런데 학교 선생님과는 다르게 학원에는 부모님이 직접 돈을 지불했는데, 나와 내 부모님의 감사함은 진정한 감사함인가?

아이의 주장은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참 꼬인 생각이지만, 어릴 때 나에게도 이 아이처럼 본질적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했을 때, 서로 감사해야 하는지 뚜렷한 이해가 요구되었다. 서로 좋자고 하는 건가. 감정은 감정, 거래는 거래일뿐인 건가.

그러던 어느 날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이 나의 혼란을 해소해 주었다.


"왜 감사해야 할까?"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과 각자의 이윤 추구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기반으로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이의 주장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주의가 동작하려면 어머니의 주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라 내가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식당 주인의 이타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다만 결국 그 이기심에 의해 서로가 가진 자원 교환이 최대 행복에 기여하기에 이기심이란 '악'이 아닌 것이다. 무조건적인 이타심이 ‘선’이 아니듯이

본질적으로 내가 지불한 자원 또한 나의 노동의 산물이며 식당에서 제공한 자원 또한 노동의 산물이니 그것이 성공적인 거래를 이룰 수 있음에 감사한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버니 집 앞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단 말이다.

'돈 냈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와 '돈만 받으면 땡'과 같은 거래만 지속되면 결국 효용은 낮아지고 자본주의는 실패한다는 것.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을 하여 그에 맞는 도덕적 판단을 하기 때문에 서로 먼저 해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현실은 매우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핵심은 사람의 공감에 기반한 효율성에 있다.

그래서 질문 자체가 틀렸다. 어떤 이유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에 이 거래가 동작하는 거였구나.


"사람이 아니라면?"

국부론에서의 부는 금도 화폐도 아닌 '노동'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재화와 서비스는 결국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만들어낸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개입되는 사람이 아닌 개체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어떨까? 사람이 만든 음식을 로봇이 서빙해 준다면 음식을 해 준 사람과 서빙을 해 준 로봇에게 모두 감사할까? 로봇이 아닌 동물이 해줬다면? 우리는 그러면 노동의 가치를 만들어 주는 모든 개체에게 감사를 표하면 효용이 올라가는 것일까?

지금의 서빙 로봇은 음식이 나오면 테이블 번호를 입력하여 '출발'을 누르면 해당 테이블에 음식을 가져다주고 손님이 음식을 모두 받은 후에 '확인'을 누르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들의 동작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 미래에는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카메라 센서를 통해서 완료된 음식을 올려두기만 하거나 음식을 받기만 하여 동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로봇이 어떠한 방식으로 동작하는지 파악하고 역으로 완전히 설계할 수가 있다.

다만 더 나중에 현재 LLM 및 그 이상의 AI가 탑재되어 다양한 센서로 상황을 인지하고 서빙을 수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그것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대부분 실험적으로 알 수 있지만, 역으로 완전히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 수 없다면, 그리고 재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유의미한 '공감'의 대상이 된다.


"정답은 불확실성과 기억력에"

나는 누군가 로봇 강아지를 발로 찼을 때, 본능적으로 동정심을 느낀다. 로봇공학에 조예가 깊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로봇 강아지의 동작 방식이 어떤 물리 센서의 신호와 시각적인 센서의 신호를 받아서 넘어지지 않도록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넘어지지 않고자 어떻게 행동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확실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호를 기억한다면 발로 차였을 때와 비슷한 신호는 피해야 하는 대상으로 학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확실성 때문에 정확히 어떤 유사한 신호들을 피하게 학습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이렇지 않을까라고 유추할 뿐. 다만 그게 '공감' 아닐까?

더 가까운 예로, 우리는 LLM이 어떻게 답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난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LLM이 이렇게 반응하지 않을까? 유추할 뿐이다. 고로 나는 이러한 '불확실성'과 스스로 학습할 대상이 되는 신호의 '기억력'이 있다면 그것은 공감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불확실한 서빙 로봇에게는 본능적인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효용을 늘리는 똑똑한 행위일 수 있다. 지성이 있는 로봇이라면 '감사합니다’라는 나의 신호를 공감이라는 개념으로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있을 테니까.


"새로운 종의 탄생"

공감에서 더 나아가 AI 휴머노이드에게는 인간이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가지듯이 AI에게도 분명 그러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AI를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형태, 즉 자생하고 의미 있게 재현하고 진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누군가 배포한다면 그 이후로는 새로운 종의 탄생이 될 것이다. 미리 인사합니다. AI야,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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