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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Sep 12.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7)

하버드대 MBTI학과 졸업생의, 한 ENTJ 러너에 대한 존재탐구론

<경고: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과몰입 중인 작자가 작성한 글입니다. 읽는 즉시 각종 편견과 선입견, 성급한 일반화에 맞닥뜨릴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시오.>




필자는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MBTI 성격 유형 검사에 과몰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렇게 말하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오 저도요!’


혹은,


‘그런 걸 믿으시다니. 이 분 혈액형도 믿으시겠네.’


한마디로 MBTI라는 검사에 대해서 신뢰감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파가 나뉘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전자에 속한 사람이고, 본인이 MBTI 검사를 꽤나 신뢰하는 이유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지만 이 글은 MBTI 검사에 대한 예찬이 목적이 아니라 한 남자에 대한 예찬(?)이 목적이므로 MBTI 검사에 대한 나의 사견은 적당히 생략하기로 한다.


이 글은 진지함과 드립 욕심이 반반 정도 섞여 있고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므로 혹 MBTI 검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면 살포시 <뒤로 가기>를 눌러 필자의 다른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글들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자, 그럼 이제 필자가 몹시 애정하는 ENTJ 유형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시작해 보자.


ENTJ가 도대체 뭐 어떤 유형의 인간들이냐? 고 묻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단단히 후려쳐서 인간의 특성을 납작하게 압축한 설명을 잠시 해보겠다.


E = 비교적 외향적이고

N = 직관이 발달 (=내가 해석하기로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을 우선시하는 사람보다는 추상적인 가치들에도 만만찮게 관심이 많은 몽상가형 인간들)

T = 감정보다 논리, 사실을 중시하는 편이고

J = 새로움, 자극을 추구하는 사람들 보다는 안전하고 익숙한 것들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음


이 네 가지 성격 특성들을 한데 묶으면 이제 ENTJ형 인간들이 완성되는데, 당연하게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들은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가 크고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상이 거창하다(?) 싶을 만큼 높으며 그런 본인의 이상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기계처럼 매우 팍팍하게 다루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주 요란하게 후려치고 압축해서 한 설명이지만 그래도 나름 꽤나 잘 설명한 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ENTJ 박사라고 자칭할 만큼 그들을 오랜 기간 여러 각도로 분석해 보았기 때문이다.


왜냐. 희한하게도 내 주위엔 어렸을 때부터 ENTJ형 인간들이 많았다. MBTI 검사를 아예 몰랐던 시절부터 그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알고 골라 사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자석처럼 끌려서 친해지고 난 뒤 알고 보면 ENTJ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한 번 더 들어가 골똘히 생각을 해보면 나는 기질적으로 타고나길 자극에 대한 추구가 강하고 호기심과 충동성이 강한 P형 인간이었는데 그런 스스로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해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 주제에 또 욕심은 많고 이상은 높아서 나처럼 이상도 높은데 그 이상을 향해 체계적으로 달려가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는 듯 보이는 ENTJ들이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그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서식하며 그들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주변엔 ENTJ형 인간들이 발에 채일만큼(?) 득시글거리고 있었고 자연히 그들에 대한 분석 능력 및 그들을 알아보는 감별 능력이 남들보다 개발되어 갔던 것이다.


그런 내가 우리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ENTJ는 바로, Jay라는 남자다. 내가 처음 가까운 트랙이 있는 운동장에서 열린 러닝벙에 참석했을 때 얼굴을 익히게 된 Jay님은 알고 보니 사는 동네가 몹시 가까운 이웃 주민이었지만 집과 운동장이 걸어서 가기엔 꽤 거리가 있다고 생각해 따릉이를 이용해 오고 가는 나와 달리, 본인의 집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뛰어서 사전 러닝으로 예열(?)을 하고서 러닝벙에 참석을 하곤 했다. 혹여 운동 전에 땀이라도 날까(?) 힘이라도 뺄까(?) 조심조심하는 나와 달리 늘 이미 상의가 땀에 푹 젖어있는 채로 단체 러닝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신선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그는 시작할 때뿐만 아니라 단체 러닝이 끝나고 나서도 어김없이 혼자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늘 통상적으로 두 배의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이따금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치하를 하면 ‘별 거 아니에요.’, ‘저보다 더 잘 뛰시는 분들 많은데요 뭐.’라고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의 부정이 되돌아왔다. 그때쯤 생각했다. ‘이 인간... ENTJ 같은데?’


내가 만난 ENTJ들은 다 평균의 사람들보다 엄청난 노력을 하면서 살고, 그래서 평균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성취를 거두지만, 본인의 업적(?)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법이 없다. 그들의 시선은 항상 더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한 사업가 ENTJ는 본인이 늘 스티브 잡스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자신은 별 것도 아닌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CEO라고 인정을 받았던 잡스 정도는 되어야 대단한 인간인 것이고, 자신이 하는 퍼포먼스는 노력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정도로도 꾸준히 노력하고 성취하고 살지 않는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과히 숙연해지게 만드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Jay님 역시 보면 볼수록 너무나 전형적인 ENTJ형 인간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매일 러닝을 한다. 회사원인 그는 아침에 출근 전엔 헬스장이나 회사 근처에서 꼬박꼬박 혼자 5k~10k를 뛰고서 인증샷을 채팅방에다 올리고, 아침에 그렇게 뛰었는데도 또 저녁 단체 러닝에 참석해 10k 가까이를 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회식을 하거나 야근을 하는 날, 몸이 힘든 날에는 러닝을 거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200k는 늘 가뿐하게 뛰어버리는 그는 명실상부히 우리 방의 에이스다.


나이키 런 클럽(이하, NRC)이라는 어플에서 서로 친구추가를 해 기록경쟁을 하는 우리 러닝방 멤버들 사이에서는 가끔 ‘어일제다’라는 말이 오고 가곤 하는데 ‘어차피 열심히 뛰어봤자 우리 방 일등은 Jay다’,라는 농이 자연스레 납득될 만큼 그는 압도적 런친놈(러닝에 미친놈)인 것이다. 그런 그의 미친듯한 열정은, 바라보다 보면 강한 전염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고통스럽고, 매번 한계에 부딪힐 게 뻔한 러닝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 물론 그건 나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 방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꾸준히 달리는 러너들 중 아무도 억지로 등을 떠밀어 이런 취미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Jay님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면, 그는 달리고 있는 그 순간순간을 매번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와 앞뒤로, 혹은 나란히 같이 달리다 보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리는 혼잣말을 본의 아니게 계속 듣게 되는데, 그는 달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늘 ‘아 좋아’, ‘아 너무 좋아’, 이런 혼잣말을 연발하곤 한다.


러닝을 하며 가끔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바람이 너무 상쾌할 때, 이상하게 기분이 고조될 때, 러너들은 모두 ‘러닝뽕’이 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늘 저렇게 ‘러닝뽕’에 차 있기도 쉽지 않다. 러닝은 대개가 고통스럽고, 그만두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다. 그 순간들을 이겨냈을 때에 비로소 성취감과 도취감에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는 복합적인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고통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인종이 다른 것일까? 날 때부터 저렇게 강인했을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의문의 끝은 항상 이런 생각으로 귀결된다. ‘나도 저렇게 고통을 즐기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 나만이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방에는 대표적으로 Jay님을 비롯해, 다른 사람의 열정에 기름을 부어주는 ‘광인’들이 많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너무나 비범하다’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이따금 광인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불을 지펴버릴 만큼 뜨겁게 최선을 다해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좋아한다.


‘저들은 혹시 나와 다른 인종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 광인들 역시 나처럼 팔 두 개, 다리 두 개, 폐 하나, 심장 하나를 가진 ‘사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동경의 끝 무렵에는 그들을 가만히 우러러보다 ‘나도 저렇게 해볼까?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소망이 생겨나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품은 채 나란히 뛰기 시작하다가도, 익숙한 한계에 부딪치자마자 일찌감치 포기하려는 습관이 있는 내 근처에서 나란히 뛰며 단호하고도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걱정 시동이 걸릴 틈도 없이 브레이크를 대신 밟아주는 Jay님은 이따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한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 첫 미니시리즈 공모전 제출용 대본의 완성을 앞두고 있던 무렵, 갑작스러운 부친의 부고가 닥쳐와 예기치 않게 장례를 치르며 크나큰 슬픔에 휩싸여 ‘이번 공모전은 못 내겠어. 무리야.’라고 풀썩 주저앉아버렸던 내게 식상한 위로와 공감 대신, 건조하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아니, 할 수 있어. 해야 돼. 우리 집으로 와. 힘들어서 못 쓰겠으면 내 옆에 와서 같이 앉아서 써.’라며 내 손을 강하게 잡아끌어 주었던 한 친구가 있다.


나는 결국 장례를 마치고 그 친구의 말대로 그 친구의 집으로 가 그 친구와 함께 먹고 자며 장례식이 끝난 지 2주 만에 공모전용 대본을 완성해 제출하는 기염을 토했고, 비록 공모전에서 최종심까지 올라갔지만 입상을 하지는 못했는데 운 좋게 대본 심사를 했던 한 PD님의 눈에 들어 꿈에 그리던 미니시리즈 데뷔를 하게 된다.


그때 그 친구가 나의 고통을 연민하며 공감하고 위로만 해주었다면 나는 결국 대본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 것이고, 그 후에도 힘이 들 때마다 반복적으로 도망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 앞에서 더 큰 고통 속으로 기꺼이 나를 등 떠밀어준 친구 덕에 나는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나도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친구의 MBTI는 ENTJ다.


내가 러닝방에서 만난 Jay님 역시,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고통을 기꺼이 즐기고 다른 사람들마저도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끔 꾸준히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모습에서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타적인 열정부자, ENTJ의 생태적 습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격려까지는 해주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계속해서 고통 따위 무감하게 치부해 버리며 태양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는 이카루스처럼 그저 멋있는 존재로 내 곁에 존재해주기만 해도 좋다. 인간의 삶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존경하고 배울 점이 그득한 롤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니까.


당당히 고백하건대 내 러닝방의 롤모델은 우리 방 NRC 랭커 1위, 꾸준히 고통을 즐기는 열정부자 Jay님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아마 또 ‘저는 별 거 아닌데’, ‘저보다 멋진 사람이 많은데’라고 말할 것 같다. ‘저는 술도 자주 마시고’, ‘아직 페이스도 00밖에 안 되고’, 어쩌고 저쩌고... 이 추론은 하버드대 MBTI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졸업생의 추론이므로, 믿거나 말거나다.





Dear. Jay

저의 롤모델이신 Jay님은 그러므로 영원히 우리 러닝방을 나가서는 안 됩니다. 오래오래 우리 방의 어일제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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