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버무비 Jun 24. 2018

피아니스트

La Pianiste, 2001, 미카엘 하네케 감독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중년의 피아노 강사 에리카는 상당한 피아노 실력으로 엄격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완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관음증이나 피학적인 행동에서 오는 쾌락을 좇는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다. 에리카에게 첫눈에 반한 공대생 월터는 그녀의 제자로서 더욱 가깝게 접근한다. 에리카는 그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갈등 끝에 자신과 육체적인 관계를 원했던 월터에게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욕망을 모두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 이 리뷰에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남에게 절대 밝힐 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의 이유를 꼽을 수 있다. 다른 이에게 알려주기에는 너무 부끄럽거나, 혹시라도 이 비밀이 밝혀진다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에 혹은 타인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자신의 성적인 욕망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저질러버린 행동일 수도 있으며, 오직 나만 아는 타인의 은밀한 행위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의 비밀을 밝힌다고 한다면, 제정신에 이야기를 하든 술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가 상대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든 간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 마련이다. 그 비밀을 듣게 되는 사람은 신뢰성에 관해 두 가지의 충분조건들을 충족시킨 사람이어야만 한다. 첫 번째는 그에게 내 비밀을 말한 이후에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퍼뜨리지 않는다는 신뢰성이 충분히 쌓인 상태여야 하고, 두 번째는 이전처럼 변함없는 태도로 나를 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쌓인 사람이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는, '피아노를 치는 행위'는 우리에게 고급스러운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피아노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중에서 가장 진입 장벽이 낮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상당한 연주 테크닉을 필요로 하며 출중한 음악적 재능과 함께 수만 번 반복하는 연습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작중의 주인공 에리카는 '교양인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완벽한 연주로 그녀의 실력을 다시금 증명해낸다. 하지만, 외부적으로 교양 있고 도도하며 차갑기까지 한 에리카의 고급스러운 이미지 뒤에는 그녀의 숨겨진 진짜 욕망이 있다.



모두와 얽매이기를 거부한 에리카


이 영화가 단순히 마음이 울적할 때 가볍게 볼 수 있는 음악 영화가 아니다는 것은 오프닝에서부터 잘 알 수 있다. 에리카가 어머니와 싸우는 장면으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데, 제목만 '피아니스트'일 뿐, 이는 주인공의 내면과 인간관계를 앞으로 중점적으로 그리겠다는 선언이다. 또한,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 중간마다 제작진 이름을 넣으면서 감상을 방해하는데, 마치 제목만을 보고 힐링 음악 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을 조롱하듯 '당신이 집중해야 할 것은 피아노가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양면성을 띄는, 에리카의 복잡한 내면이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월터를 대하는 태도나 은밀히 자신의 성욕을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여러 행동들을 100%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를 하지, 다른 사람이 처리해버린 휴지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지 않는다. 모르는 커플이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방뇨하는 행위를 이해해줄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직접 욕망을 해소하기보다는 혼자 간접적으로 해소한다. 왜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가 해당하는 지위에 맞는 역할을 그녀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강요했기 때문이다.


데표적으로 에리카의 어머니가 그 사람들 중에 해당하는데, 엄연히 에리카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들어온다는 이유나 옷이 너무 이상하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정숙한 딸의 모습을 요구한다. 교수로서 체계적으로 학생들의 실력을 책임져야 하는, 엄격한 면을 보여줘야 하고, 피아니스트로서 교양 있고 우아한 기품을 항상 유지해야 했고, 혼자 DVD방에 갔을 때는 몇몇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을 견뎌내야 했다. 사회로부터 자식으로서, 직업적으로, 여성으로서 암묵적으로 끝없이 압박에 시달리니 스스로 원하는 대로 욕망을 해소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돼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누구도 자신을 구속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할 따름이다. 에리카는 누군가가 자신을 통제하는 걸 막고자 해결책으로 아예 인간관계를 최소화시키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얽매이길 간절히 원했던 에리카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들끼리 연결하도록 해주는 첫 번째 접촉 수단은 '손'이다. 남자와 여자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가장 스킨십으로써 먼저 하는 것은 손 잡기다. 포옹이나 키스는 나중 단계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커플들이 본격적으로 직면하는 처음 단계는 손 잡고 같이 걷기일 것이다. 커플의 경우가 아니어도,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이나 새로운 동료를 만났을 때, 악수를 한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에리카는 집 밖으로 외출을 하거나 외부적으로 교양인들과 만남을 가질 때, 항상 장갑을 끼고 나간다. 이 같은 행동은 외부인과의 신체 접촉을 원천적으로 회피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또다시 그들에게 역할을 강요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에리카 앞에 그녀에게 첫눈에 빠진 공대생 월터가 나타난다. 기울어지고 일방적인 관계가 판을 치는 사회에 환멸이 났던 그녀의 삶을 구원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월터는 순수한 열정과 사랑으로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음악적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에리카와 월터는 초반부 슈만과 슈베르트에 대해서 잠시나마 이야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사가 어느 정도 일치하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앞서 에리카의 어머니가 한 남자에게 악기 얘기를 억지로 일방적으로 듣게 되는 상황과 반대된다. (여기서 에리카가 슈만은 자신이 미칠 줄 알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곡에 매달린 이야기를 해주는데, 결말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에리카는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그에게 호감을 갖고,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갖는다. 월터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 그가 그녀 깊숙이 끓고 있던 욕망을 실현시켜줄 것이라는 신뢰성을 서서히 스스로 갖게 되고, 더 나아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월터와의 관계에서 방해가 될 사람, 안나를 제거해버린다. 평소에 해왔던 대로 신체 접촉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손의 기능을 저하시켜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안나는 에리카에 의해 잠시 동안 피아노를 못 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1차적인 신체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다.



또 한 번 내면의 상처를 입게 되다.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월터와 에리카는 키스를 하고 다음 진도까지 나아가려 하지만, 에리카는 여기서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담은 편지를 읽어보라고 한다. 다음 날부터, 화장을 한 에리카의 복장은 무채색이 아닌 알록달록한 색상을 띠고 묶은 머리는 풀려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초반부와 다르게 이때부터는 에리카가 월터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가 더욱 엿보인다. 지금까지 통제당해왔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맺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에리카는 서투른 말과 행동으로 월터를 당혹시키기도 한다. 에리카가 그와 대화를 시도하는 원동력인 사랑은 순수한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모든 비밀이 적힌 편지를 읽게 될 때, 월터는 그녀의 진심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묶고 때려달라고 하면 당황하는 게 맞는 반응이긴 하지만, 아예 인연을 끊으려고 한다. 월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거부한 것에 대한 실망감과 처연함 그리고 제발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간절함 등의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눈물이 이자벨 위페르의 명연기와 더불어 심금을 강하게 휘젓는다.


여기서부터 완전히 관계가 역전되는 점이 흥미롭다. 월터는 에리카와의 대화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그녀가 일했던 음악원에 갔었는데, 반대로 에리카가 월터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고 그의 체육관으로 간다. 한 번밖에 없을 순수한 애정 섞인 관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초반부에 슈만의 이야기처럼 그녀가 그에게 매달린다. 영화 전반부에 묘사되는 차가운 이미지의 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나중에 월터는 에리카의 말을 들어주겠다면서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폭행하고 강간하고 떠난다. 이제 됐냐고 물어보는 그의 말에 부정적인 대답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에리카가 원했던 구속과 학대는 순수한 애정의 교류라는 전제 조건 하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월터가 저지른 짓은 그저 강압적인 폭행과 강간뿐이었다. 강간은 성적인 관계에서 가장 악독하고 일방적으로 강압적인 범죄인 걸 감안하면 월터 또한 그녀에게 '피학자'로서의 역할에 해당하는 행동을 강요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연주회에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보여주기는커녕 웃으면서 교수님의 연주가 기대된다면서 가족들과 입장하는 월터의 모습에서 마지막 희망을 가졌던 에리카는 깨닫는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다는 것을. 스스로 어깨에 칼을 찌르고 연주회를 떠나는데, 깊게 생각해보면 영화 속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에리카는 씻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입었고, 그녀가 원했던 관계는 모든 면에서 쓸쓸하게 파탄이 나버린 상태로 끝난다. 앞으로 에리카가 이전처럼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지는 확실치 않다.


에리카가 원했던 욕망은 자극적이고 독특한 것임은 분명하나, 그 욕망 아래에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문단에서 밝혔듯, 비밀을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월터는 두 번째 조건대로 이전처럼 변함없는 태도로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까지 포기하고 월터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주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처절한 몸부림은 보는 사람들까지 가슴 아프게 만든다.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사회적인 지위로서의 역할에 완전히 지쳐버린 에리카는 표면적으로는 타인과의 접촉도 최대한 피하고, 격식 있게 행동하면서 차가운 이미지로 일관했다. 그녀의 피학적인 욕망 또한 같은 이유에서 발현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맡은 암묵적인 역할들에 의해 쉴 틈 없이 자신이 무언가를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는 책임감에 찌들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책임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성적인 관계에서 수동적으로 학대를 받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마조히즘과 맞닿아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 인간에게 부여되는 지위는 더욱 늘어나기 마련이며, 그 지위에서 오는 책임은 더욱 막중해진다. 스트레스의 해방구로서 가학/피학적인 관계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의 전제 조건은 인간적으로 자신과 애정을 교류할 수 있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서투르지만 무구한 사랑이 담긴 의도로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좇는 에리카의 모습은 마치 순수한 소녀의 모습과 동일했다.



이자벨 위페르의 경이로운 연기 덕분에 관객은 초반부까지만 해도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렸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하고, 그녀를 설득력 있게 납득할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를 할 때부터 어머니에게 안겨 한을 토로하듯 눈물을 쏟아내는 연기까지 에리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는지 짐작하게 만든다. 말 그대로 에리카 코우트 교수에게 숨결을 불어준 셈이다. 동화를 정말 어둡게 현실적으로 각색한 것처럼 처음까지만 해도 에리카는 시련에 빠진 여인, 월터는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는데, 끝까지 보니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만드는 여주인공이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미카엘 하네케의 연출 능력 또한 상당히 훌륭했다. 오프닝 장면이나 에리카가 어머니와 침대에서 대화하는 장면, 화장실 장면 등 여러 장면들에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하면서 마치 그들 옆에서 사건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극에 사실감을 더욱 불어넣는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어떻게 끝맺음이 날지 예측하게 만드는 몰입도 또한 상당한 편이여서 극중 주인공들이 치는 피아노 연주 이외에는 어떠한 음악도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별개로 실제로 배우들이 배역을 위해서 피아노를 직접 연주했다는 것에 감탄했다. 분명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이겠지만, 연출과 연기 면에서 비판의 칼날을 들 사람은 굉장히 드물 것 같다. 햇빛이 비추는 낮에 창문 밖을 홀로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다. 8/10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의 몸부림만큼 애처로운 몸부림은 없다.


작가의 이전글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