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쟁과 암호 해독이라는 서사를 넘어 인간의 사고와 기계의 한계 그리고 사회의 편견이 한 천재의 삶을 어떻게 삼켜버렸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앨런 튜링은 단순히 암호를 푼 수학자가 아니라 현대 컴퓨터 과학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가 만든 기계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개념이었다. 사람이 직접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대신 기계에게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계산하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그는 ‘생각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디지털 기기의 근간이 되었다. 컴퓨터는 결국 “인간의 사고를 흉내 내는 기계”이며 튜링은 그 원형을 구현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기계가 사고할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 가장 상징적인 질문은 바로 튜링이 제시한 이미테이션 게임, 즉 우리가 오늘날 “튜링 테스트”라고 부르는 개념이다. 어떤 존재가 인간과 구별되지 않게 사고하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간처럼 간주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인공지능이 현실이 된 지금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앨런 튜링이 제시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능이라 말할 수 있는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이론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인간처럼 말하고 쓰는 인공지능과 매일같이 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감정적인 위로를 받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 받는다. 어떤 순간엔 그들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잊기도 한다. 이처럼 기계가 인간과 구별되지 않게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있다. 튜링 테스트는 지능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를 묻는다. 인간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처럼 생각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 패턴을 효과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GPT는 언어의 문맥과 확률에 따라 다음 단어를 예측할 뿐 자기 존재를 인식하거나 의도를 갖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능을 판단하는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진짜 ‘이해’를 요구하지 않고도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내면의 의식과 의도가 없는 한 그것은 진정한 지능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이 딜레마는 튜링 테스트의 현대적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 이제는 단순히 기계가 말을 잘하느냐를 넘어서 의식, 자율성, 윤리, 책임이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그리고 인간 고유의 영역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이다.
튜링은 생전에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를 단정짓지 않았다. 그는 다만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그 차이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문턱에 서 있다. 기계가 인간을 흉내 내는 시대, 우리는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더욱 강렬하게 묻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을 향한 이해의 결핍이다. 튜링은 자폐적 성향을 지닌 외톨이였고 동성애자였으며, 사회적 틀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을 돕고 구한 인물이었지만 끝내 사회는 그를 파괴했다.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느냐는 질문 이전에 “우리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절박해진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과학적 발견의 드라마이자 이해 받지 못한 존재를 향한 연민과 성찰의 이야기다. 기계가 인간을 흉내 낼 수 있는 시대, 우리는 아직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