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힌 무용가의 장구춤 퍼포먼스 및 설치작업이 결합된 영상물 <난무>(2009). 장구 가락과 시원한 풍경이 어우러져 청량감을 준다.
아이패드로 그린 드로잉을 다시 회화로 옮긴 아날로그-디지털의 경계를 넘는 <별, 꽃, 아이>(2024)는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이라고 한다.
지하 1층에 펼쳐진 <분홍 인생>(2020)을 맞닥뜨리면 작가의 무한한 에너지와 열정의 끝은 어디일까 가늠이 안 될 정도다. 고인이 된 모친의 의상실인 '스왕크(Swank)'에 대한 헌정이자 작가의 세계관을 한데 담은 소우주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윤석남의 <핑크룸>과 연장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분홍인생>은 멕시코 소설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1989)에서 영감 받았다고 한다.
오래전 이 영화를 봤었는데 남미 특유의 마법적 리얼리즘과 멕시코 요리를 통해 여성의 욕망과 사랑을 표현한 페미니즘 문학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소설도 읽고 싶어졌다.
홍지윤은 소설을 통해 어릴 적 의상실을 운영했던 모친과 그곳에서 오색창연한 옷감들과 놀던 자신을 떠올렸다고 한다.
재봉틀을 이용한 자수작업과 직접 디자인한듯한 의상도 모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작가의 유산인 것 같다. 그의 작품의 원천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모친은 196-70년대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노라 노의 제자로 뛰어난 패턴사였다고 한다.
홍지윤의 어머니도 한때 일본 유학을 꿈꿨지만 집안의 반대로 좌절되자 자신이 누리지 못한 걸 딸에게 실현시켜 주었다. 어머니의 지원 하에 작가는 독일 유럽 등지의 미술관을 순례하며 서구미술을 경험했고 독일, 이탈리아에서 전시 및 레지던시를 했다.
해외 체류 경험은 작가의 작품세계가 한국화의 경계를 넘어 동시대성을 획득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종이와 색채의 실험은 사공의 뱃노래와 오페라가 만나고, 장자와 남미의 문학이 만나고 카모플라주와 한복이 한데 어울리는 홍지윤 스타일을 직조해 냈다.
2024년 한 해 미술계 이슈 중 하나는 여성미술가들, 페미니즘 미술이 아닐까 싶다. 올해 가장 주목받은 기획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미술가들>(내년 3월까지)이었다. 비슷한 시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선보여 그동안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주목받지 못한 원로 여성화백들의 작품들을 재주목했다. 출판계에서도 한국 페미니즘 미술을 총정리하는 책들이 2권이나 나왔다. 9월에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읽기: 한국 여성미술가들의 저항과 탈주>가 나온데 이어 10월에 <그들도 있었다-한국현대미술사를 만든 여성들>도 잇따라 출간되었다.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세계를 그린 홍지윤의 작품도 충분히 페미니즘 미술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는데 도록이나 작가의 인터뷰 그 어디에도 페미니즘 미술가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 모든 경계를 허무는 작가 본인이 그런 담론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그럴 거란 짐작이 든다. 향후 작가의 세계에선 어떤 것들이 접속해 원융하고 폭발할까 기대하며 전시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