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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경화 Feb 27. 2022

간 보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상처를 주는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상처를 받는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상처를 주는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상처를 받는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난 언제나 후자를 택한다.



두 번, 세 번, 백번을 물어봐도 나는 상처를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택한다고 말한다.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며 그 속에서 자의든 타의든

감정에 의해 소통에 의해 행복을 나누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갈등을 빚게 되는 구조다.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마찰이 생기면서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은 당연하다.


내가 뜻하지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쪽이 될 수도 있다.

고의적이지 않았어도 시간이 흘러 나의 행동, 나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지만 상대에게는 큰 의미를

지니며 상처를 주게 된 사례들을 종종 겪었을 것이다.


반대로 같은 사례로 나 역시도 상대가 고의적이지 않았어도 상처를 받게 되는 경험을 수차례 겪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이다.



고의가 아님에도 상처를 주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인데 굳이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주냐는 말이

나의 핵심이다.

에쓰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면 상처를 주고받는 것임에 나는 기꺼이 상처를 받겠다는 것을 감행하겠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의 가치이다.



그런데 사람과 인연을 맺을 때 매번 한발 짝 물러나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나이 듦에 따라 더욱 그렇게 인과관계, 이해관계를 따져가며 자꾸 줄자로 재듯 칼같이 사람 관계를 재려는 사람들을 본다.


그 사람들은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으니 더 이상 받지 않을 거야. 나는 나를 방어하는 것뿐이야"

라는 자세이다.


그런 마인드라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은 항상 내가 더 상처받는 쪽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내가 항상 지는 쪽이었으며, 내가 항상 아픈 쪽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처의 큰 대미지를 겪은 사람은 그런 사소한 설명조차도 애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말하지 않고 묵언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큰 상처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


소위 간 보는 사람!!


이 남자가 어떤지, 이 여자가 어떤지 자신의 마음을 먼저 보이기도 전에 상대의 마음을 가지고 쥐락펴락 의중을 떠보며 지저분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


상처를 덜 받으며 살아가고자 혹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치사하고 야비하게 구는 처세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과 서로 간 본다면 참 좋은 그림이겠지만

나 같이 솔직하고 스펀지처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는 사람에게는 지옥과 같은 사람이다.

간 보는 사람에겐 무시가 답이다.

이를테면 카톡에 답장 따위 안 해줘도 상관없다. 이건 간 보는 게 아니라 당신의 배려 없는 감정은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뜻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일에 있어 어중이떠중이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상사에 입장이라면 부하직원에게 일명 몰빵 시키고 일의 진척이 어떻게 되는지 간 보면서 직원을 간접적 심리로 메말라 죽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협력하고 상생해야 하는 입장인데 한쪽만 너무 열정을 다하는 경우도 본다."나는 이 정도만 하면 되겠지" 그 이상의 노력과 집중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에너지를 보고 손을 놔버린다. 그러다 분위기 상 아니다(간을 보다)싶으면 일을 하는 척 입만 조잘거린다.



간 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행동화'하지 않는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결정이 났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전에 '말'로 다 수습한다.



"언제 한번 밥 먹어요"

"한번 봐야 하는데.."

"요즘 바빠? 언제 서울 와?"

"그 일은 제가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잠시만요"

"저보다 더 잘하셔서 연락 주실 때까지 기다렸죠"

"업체에서 결정을 못하는 것 같아서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자신에게 솔직하며 타인이 보기에도 물론 솔직하다.

상처도 숨기지 않고 감정도 숨기지 않으며 상대에게도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애매한 말로 사람의 의중을 떠보듯이 말하지 않는다.





"다음 주 부산에 내려갈 거예요. 이런 음식 어때요?"

"제가 알아봤는데 결정은 XX 씨가 하는 거지만 선택사항이 있으니

한번 들어보고 고려해보시는 게 어떠세요?"

"바쁜 것 같아 보기 좋네. 그때는 미안해서 이번에는 내가 시간 내서 만나러 갈게. 그날 시간 돼?"

"제가 아직 일에 서툴러서 과정 진행이 미흡했죠? 세세하게 알아보느라 시간이 늦었습니다.

업체에서도 제가 늦느라 같이 늦어지는 상황인가 봐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 보지 않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말 할 줄 알며 사실에 의거한 자신의 감정도 상대방에게 진솔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것이 행여 거절의 의사이거나 우리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해 실패로 갈지언정 모든 과정과 결과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간 보는 사람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제대로 된 행동도 갖춰보지 않은 채 그야말로 입만 나불대다가 경험해보지 않고 있으니 당연지사 과정도 없고 결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가장 말 많은 이들도 그들이다.




상처를 받는 쪽이 백번 낫다고 늘 주장하는 것은 내 상처에 내가 책임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 감정에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삶이란 그 얼마나 너저분한 삶이란 말인가?


한 세상 살면서 나와 인연을 맺는 모든 이에게 인간 송경화, 송가희는 참 진솔한 사람이었노라고

거짓 없이 자신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만 들어도 이 세상 잘 살아온 증거다.



자신의 삶의 솔직하려면 매 순간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자신을 간 보듯

타인을 간 보지 말자.




자꾸 간 보다 보면 (음식에)  간 상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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