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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경화 Apr 27. 2022

인격, 비열함의 저 끝에서...

선행(대인배, 모범)하는 사람들의 진짜 두 얼굴


살다 보면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는 순간을 볼 수 있다.



혼잣말의 김수민 작가 sns의 출처



김수민 작가의 글에서 조금 더 보태자면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는 옹졸하고 비열함,

자신의 우월함? 만(혹은 자신의 교만과 자만에 빠져) 강조하며 상황을 합리화하는 비겁함으로

끝까지 모면하며 타당성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다 보고 있고 다 느끼고 있다.



타인이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타인에 대해 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결론까지 지어버려 상대를 곤란하게 함에도 내 해석이 끝까지  맞다고 고집한다. 황당할 따름이다.






또 확인되지 않는 본인만의 감정적인 부분을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의 인격.


남의 말하기 좋아해서 남의 험담을 일상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이 험담인지 인식 못하는 것 또한 너무나 큰 인격적인 문제라는 것,


그런 사람을 옆에서  가만히 듣고 보면서 맞춰주며 그들의 진짜 수준을 점차 파악하고 서서히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 얼굴에 소스라치게 놀랜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는지 결국 큰 거사를 치를 때 틀림없이 본성을 드러나게 되고 사건은 그곳에서 발생한다.



포용할 줄 모르고 감싸줄 줄 모르며 나의 방식이 맞다고 맞을 때까지 어떠한 방식으로도 주위를 자기 해석화 하곤 한다. 그런 잘난 이기심으로 인해 이곳저곳 분란만 일으키더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그럴싸한 말로 대인배인 척 역시나 자신을 포장하며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다.



과연 그게 올바른 것일까?



그동안 조용히 말없이 보고 있던 이들, 고통받고 있던 다른 이들은 아무도 말 못 하며 속앓이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강한 주장에, 그들의 입 세력에 그저 지켜보고 있으며 쑥덕쑥덕 거리며 한 사람 한 사람 소외시키니 전체를 보고 전체를 듣고 있는 이의 눈에는 도대체 어떻게 보이겠는가?

잘해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기 위해 비위를 맞춰주니 그 도가 지나쳐 많은 이의 가슴에 상처만 남겼다.








또 다른 상황에서의 인격의 상황을 판단해보자.

자신의 위치에 자신의 자리, 자신의 본분을 겸손하게, 숙연하게, 아집 없이, 적재적소 수용하며

그 장소와 상황에 맞는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 하겠다.



나도 여러 곳에 직책과 리더를 겸하고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지만 배움을 좋아하는 배움이 필요로 하는 나는 아직도 다른 곳에서는 학생이고, 상황과 장소에 따라서 직함과 직책을 다 버린 한 사람의 일원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연출 감독의 불호령 같은 지시에 따라야 하며

교수님과 선생님의 촌철살인도 들어야 하고 내가 이렇게 못하는 건가? 싶은 순간적인 위축도 들만큼 코칭과 레슨도 받는 것이다. 그래야 성장하고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열의를 가지고 내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그 감사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기 참 어렵지 않은가? 하여 나이가 더욱 들어갈수록 배움에 대한 선생님의 대해 불만을 갖는다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그런 생각은 큰 오만이고 건방이다.



요즘 아이들이 선생들에 대한 존경심이 하나도 없는 도덕적, 인지적 사상에 대해 매년 5월이 되면 뉴스나 언론보도가 이어진다. 특히 학교 선생, 스승에 대한 은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한다. 선생보다 더 잘난 아이들의 독보적인 생각과 마인드가 강한 것이 주된 이유이며 그런 사회적인 환경과 정서, 가정까지 삼박자를 이루어져서 그렇다는 전반적인 분석이며 전문가적인 해석이다.

과연 아이들만 그럴까?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선생을 대하는 자세든, 선생이 학생을 대하는 자세든, 모델이 무대를 대하는 자세든,

모든 태도에서 인격은 나타난다.

자신이 무대를 알고 있고 서왔다는 사람이, 자신이 교육을 알고 있고 교육을 해왔다는 사람이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를 비방한다면 더욱 그 칼날은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도 어릴 때부터 무대를 서온 사람으로 강연자, 강사로써 강연의 무대를 , 무용가로서 무대를 , 지금의 모델이 되어 패션쇼 무대를 서는 지금까지 모든 무대는 어렵고 진지하다.

항상 무대에 대한 예의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어떠한 무대라도 무대를 준비한 많은 이들의 엄청난 노고와 에너지를 안다면 무대 상황에 대해 재빨리 파악해서 움직이고 무대에 함께하는 동료들을 자신이 먼저 챙기면 된다.

무대감독의 지시에 발 빠르게 따르고 주의를 집중하고 기다리고 있다면 아주 좋은 자세이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활동하는 여러 패션쇼와 여러 단체의 선생님, 선배, 언니, 동생, 동료들과도 트러블 한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트러블이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다. 예를 들어 연습할 때나 무대에서나 실수나 문제가 생기면 니탓, 내 탓을 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관계도 문제가 함께 발생한다. 내 탓이고 내 문제라고 인정 해버 리거나 함께 개선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자세를 보이면 아무 일도 아니다. 누구의 탓을 돌리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 대한 (모욕) 욕설이 되어버리고 그 무리는 그 사람을 헐뜯는 무리가 된다.

그건 지금의 아이들, 학생들이 고통받는 학. 폭과 다를 바가 없으며 예전의 왕따와 똑같은 것이다.



무대에서 함께 쇼에 서는 동료들과 트러블 없이 잘 지내고 있다.



리더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무대감독, 연출 감독 중에 평소에는 인자하다가도 행사, 쇼 당일에는 무탈하고 싶고 계획에 세운만큼 완벽에 가까운 행사를 치르기 위해 예민해진다.

그 예민함에 대해 나는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당연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감독들은 욕설을 내뱉기도 하고 마이크가 찢어지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한다.

또는 처음에는 조곤조곤 말하다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열이 올라 무대에 올라가 열변을 토하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을 감추지 못할 때를 본다.

늦게 오는 사람, 계속 틀리는 사람, 아예 처음부터 안 맞는 사람, 혼자 다른 행동하는 사람, 전화받는 사람, 감독의 지시는 안 듣고 자신이 맞다고 우기는 사람, 가지각색의 제 각기 사람으로 연출자나 감독, 교수, 현장 관계자들을 힘겹게 한다.


그런 모습을 고스란히 본 사람으로 반대의 입장이 내가 되었을 때 나도 무대를 대할 때 예민해지며 무대에 임하는 자세를 다 함께 진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무대 올라가기 전 리허설도 마찬가지로 무대와 똑같은 컨디션으로 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자세는 내가 리더이거나 내가 모델이거나 내가 교수이거나 내가 강연 가이거나 내가 진행자이거나 내가 어떤 누구여도 상관이 없다.

무대 자체를 대할 때는 어떤 직책이든 어떤 자리든 어떤 위치든 동등한 자세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단체의 행동으로 단체의 이름으로 올리게 되는 무대 일 경우에는  개인의 생각과 개인의 행동은 접어두어야 한다. 설령 개인의 무대라 하더라도 무대 자체는 절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  아이나 어른이나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이다. 개인행동과 단체행동의 규범도 유아기만 벗어나면 미취학 아동부터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학습이다.

가장 기본이라 일컫는 기본을 간과하면 안 된다. 성인이 되고 성자라고도 하는 어른이 되어 많은 이들의 귀감을 받는 사람이라면 정말 모범을 보이고 태도를 보일 때가 언제이고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사람만 착하고 내가 아는 사람만 좋고 내가 하는 것만 재밌고 내가 보는 것만 맞고, 내가 아닌 다른 것은 나쁜 것이고 몰라도 되는 주의로 배제시키며 설사 도리에 맞지 않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크게 여의치 않는 흑백논리에 근거하는 주의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상황을 모면하는 것 또한 큰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해 면밀히 알게 될 때는 오래 알았다고 해서 다 안다는 기준을 잡아서는 안되며 잘 안다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때 아닌 낯선 장소와 낯선 상황에서 발생한 위기일 때 대처하는 모습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정도로 잘해 줬을 때, 소외된 약자에게 대하는 모습이나 소외된 약자에 대해서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 속에 가려져 있어 보지 못한 인격을 제대로 보게 된다.



장애아를 돕고 장애아를 교육했다는 사람, 또는 지금도 교육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나 장애인 같지 않아?"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사람,

본인이 받은 과분한 과정에 대한 결과물을 당연히 여기며 그저 입바른 소리로 우야무야 넘기는 사람,

모두가 낯선 환경에서 자신만 아프다며 보호받기를 바라고 고집에 의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며 인정하지 않고 남 탓으로 돌려 상황을 모면하는 사람,

함께 준비하고 만들어간 과정을 한순간에 깨트려 버리고 자신의 감정대로 발설하고 표현하는 사람,

너도 나도 위기에 봉착할 때 자신만 우월하고 맞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리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 함께 그 무리를 만드는 사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자신의 인격의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특징은 남 앞에 내세우기 좋아하고 관심받기를 극도로 즐겨해서 자신을 포장하고 상품화, 이미지화하는 것에는 전문성까지 갖춰져 있다.

그런 자신의 포장된 이미지에 스크래치가 생길까 봐 미리 자신의 단점을 알아버리거나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들켜버린 곳의 연막작전을 만들어 인간관계를 처단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을 인격. 비열함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겪는다.

좋은 것이 좋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좋다고 말한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한다. 그 '좋다'라는 함축적인 단어 안에 많은 것을 참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좋다는 단어를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보다 선한 행동을 하고 잘 살아왔다며 말하지만 사소로운 소소한 일상에서 정작 의롭지 못할 때를 종종 보게 된다.


큰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작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트러블도 스스로 개선하지 못해 남의 탓을 돌리기 위해 험담하기 일쑤,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도 넘어서 결국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앞 뒤 다른 사람이 싫다고 다들 말하지 않는가?

사람이 가진 다양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앞에서 행동, 뒤에서 행동, 앞 뒤 다른 인격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활발하게 사회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왔다고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해온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격에 대한 책임은 지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며 나도 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며 나이 드는것이 올바른것인지 나이에 맞는 태도인지 비인격적이고 비열한 사람의 투영되어 보면서 나를 다시금 거울처럼 비추어 보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나는 두 얼굴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 싶다.

두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 이 말 저 말 흘리고 다니며 사람에게 여러 얼굴 하며 추태 하는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지 않다.


비열함으로 물들고 싶지 않은 잔인한 4월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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