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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랑 Dec 29. 2020

불빛의 온도

영화 '어느가족'을 보고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먹먹한 마음을 느꼈다. 가슴이 아려오는 슬픔이 밀려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가족에겐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할머니, 중년 부부, 20대 여성, 소년은 단칸방에 함께 뒤엉켜 생활한다. 그러다 어느 추운 겨울, 중년의 부부는 어린 여자아이가 집 밖을 나와 떨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집 안에선 아이의 부모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아니라는 아이 엄마의 말을 들은 노부요는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이들 가족이 각자 어떤 사정으로 함께 살게 되었는지는 영화가 중반부로 흘러가며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다. 

 살아가는 저마다의 모습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묘사와 연출력이 섬세했다. 무언가를 더해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꾸미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요소를 과장하는 장치들도 없었다. 이들의 행동은 얼핏 보면 납득하기 어렵게 생각할 수 있다. 도둑질, 유괴, 시체유기, 유사성행위업소에서 돈을 버는 일 등. 그런데 이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서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매일을 눈물로 지새우지 않으며 오히려 사소한 상황에도 웃을 수 있고 함께하기에 겨울을 따듯하게 날 수 있다. 

 이들을 뉴스에서 먼저 접하게 되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아이를 유괴하고 사체를 유기했다는 기사를 보고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단 몇 줄의 보도로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참으로 쉽게 판단하고 재단한다. 수많은 편견으로 얼룩진 나는 함부로 타인을 평가해왔던 거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중 무엇이 진짜이고 거짓일까. 세상은 무수히 많은 표정으로 존재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결코 같은 그림을 볼 수 없다. 그 속에 숨겨진 많은 오해들을 하나하나 납득하기에 너무도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요즘 둘레길을 다녀오는 덕분에 자연을 많이 볼 기회가 생겼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흰 뭉게구름이 목화처럼 몽글몽글 피어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열심히 산을 오르고 난 뒤 아래를 내려다보면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처음 서울의 야경을 봤을 때는 마냥 멋져 보였다. 그러나 밀집된 건물을 바라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고 슬퍼지기까지 했다. 내 마음의 눈은 어느 판잣집의 가난한 달동네 골목으로 향했다. 주황색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에는 엄마의 울음소리와 물건이 박살 나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아이는 우두커니 계단에 앉아있다. 외로운 밤, 회색 개는 구슬피 울어대며 동트기를 기다린다. 불 켜진 빌딩들 안, 네모 칸막이 안에는 야근하는 직장인들이 있다. 몸은 피로로 찌들어있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에 몰입하며 늦은 시간까지 불을 켜둔 채 작업을 하는 이도 있다. 이들의 방향은 행복으로 향해있을까. 호화스러운 대저택에서 와인 한잔하는 부자도, 클럽에서 춤을 추며 밤을 불태우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불빛들이 뒤섞여있었다. 내가 본 것은 가난과 슬픔이었다. 누구는 편안하게 잠을 자겠지만 누군가는 고통 속에 잠을 이룰 도시의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게 비치는 것이다. 

 그러나 문뜩 가난과 다툼, 슬프고 외롭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빛들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매일이 고단한 하루일지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어느 가족처럼. 

 나는 연민의 감정으로 풍경을 바라봤다. 내 마음의 아픔이 투사되어 더욱 그렇게 보였던 거다. 다시 서울의 야경을 본다면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경쟁 속으로 치닫는 화려한 빛들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겠지만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빛들도 함께 섞여 있다는 걸 느끼며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없다. 사람도 없다. 내가 찾아가는 거다. 그 어딘가, 누군가에게로. 다시 경험해보고 다시 걸어가고 알아가고 넘어지고 까지고 깨지고 그러면서도 다시 또다시 일어나 걸어가고 싶다.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 모르는 사람들의 두 눈을 별처럼 가슴에 담아두고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주면서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멀리서 내려다보이는 나의 불빛의 온도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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