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인간이 아니게 해주는 <회색인간>

'김동식'의 <회색인간>을 읽고

by 하얀밤


나는 무슨 색의 인간인가.
나한테 색이라는 게 있긴 한가?
색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튀면 위험해. 모난 돌이 정 맞아.


여느 어른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다들 회색으로 산다.

회색인 척하면서 살다가,

영화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길가의 꽃을 보다가 문득 색을 찾고 화들짝 놀란다. 본인의 색에 본인이 놀란다.

<회색인간> 책은 회색인 인간이 없다는 걸 새삼 상기시켜 주는 책이다.


작가는 색을 지우고 오랜 기간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벽을 보며 일을 했다. 사람마다 색이라는 게 있는지도 생각할 여유 없이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지지 않았다. 벽에 지지 않았고, 고단함에 지지 않았다. 지지 않는지도 모르고 지지 않았다. 지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는 듯이.


그는 무한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가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고, 땅 아래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인간이 좀비가 되거나 인조인간이 되는 이야기들을.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은 했을 짧은 상상들에 살을 붙였다. 어른인 작가의 손을 거치며 어른의 이야기가 녹아들었다. 어릴 적 상상 같은 이야기 속에 우리의 삶이 녹아들었다.


소설집 속 단편 하나하나에 어릴 적 내 몽상이 있고, 지금의 내 모습이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들이 허를 찌른다. 띵, 하고 짧게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라 두두두두 우우웅... 하고 묵직한 울림을 남기고 간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은 이유다.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소녀의 초코바를 떠올린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에서 엄마가 유품처럼 물려준 초코바를 반으로 갈라서 소년에게 나눠주던 소녀. 본인도 죽을만치 배가 고팠는데 말이다. 이 둘을 지켜보던 안전지역의 인간들이 본인들도 식량난으로 허덕이는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대부분의 독자는 소녀를 택할 것이다. 안전지역의 임원들도 소녀를 선택하려 했다. 그런데 수장이 이야기한다.

소년을 선택하자고.

소녀는 초코바 껍데기를 아무 데나 버렸다고.

"그렇네. 지킬 건 지켜야지. 그걸 놓쳤네, 내가."
"맞아.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건 도덕적이지 못하지."
"그럼 그럼. 상황이 핑계가 될 순 없어."

-김동식 <회색인간> p134

수장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자들의 대화에 두둥두두우웅... 뒤통수를 맞는다. 이야기의 90% 이상을 자치하는 소녀의 애절한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에서 낙서장에 휘갈긴 이야기처럼 의미가 없어진다. 애절함, 불쌍함 모두 필요 없는 거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쓰레기를 더 야무지게 정리하는 나를 본다.


그의 이야기가 다 이렇다. 앞의 이야기들을 순식간에 무효하게 만드는 예리한 진실이 마지막에 잠복해 있다.



김동식 작가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본인이 작가로서 성공한 이유를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고 했다. 바로 '태도'였다.

인기를 얻었을 때 슬금슬금 올라오는 오만함을 작가는 경계했다. 사람들이 그의 글에 지적을 하면 항상 감사합니다, 하고 수긍했다 한다. 단 한 번도 '내가 작가다, 네가 뭘 알아'라고 반응한 적이 없다고 했다. 언제나 배우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대했고,

결국

사람들이 그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나는 김동식 작가가 책으로만 사람들에게 색을 찾아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일상을 통해, 살아온 모든 장면에서 사람들에게 색을 찾아 주었다. 내가 짧은 그의 강연을 듣고도 나의 색깔을 기꺼이 고민했듯이. 조용하지만 위트 있는 말에, 화려하지 않지만 청중을 충분히 사로잡았던 제스처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전하는 진심에 풍덩 빠졌었다.

빠지고 나오니 내게 색이 입혀져 있었다.


이 매력에 그의 글을 다시 찾게 된다.





'쓰는 자'들의 마음이 담긴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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