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모로 펴진 머리를 한 나는 한층 예쁘고 성숙해 보였어. 며칠 뒤엔 밝은 갈색으로 염색까지 해버렸지. 다음 날엔 귀를 뚫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노래방도 갔어.
기꺼이 갇혔던 감옥의 열쇠는 내 호주머니 속에 있었어. 손만 닿으면 꺼낼 수 있는 곳에. 자발적으로 고이 넣어뒀던 열쇠를 꺼내 당당하게 문을 열고 나왔지. 별을 보며 하교하던 것도 끝. 해가 쨍쨍할 때 학교를 나서서 지하철을 타고 집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날이 반복됐어.
엄마 아빠는 내 대학 입학 소식을 알리고 다니느라 바빴어. 나도 기분이 좋았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칭찬을 쏟아냈지. 마치 다 같이 그러자고 약속한 듯. 그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았어.
그중 어떤 이. 눈도 동그랗게 뜨지 않고 입도 크게 벌리지 않던 이가 불쑥 질문을 던졌어.
“임용시험을 합격해야 된다던데?
그 시험이 그렇게 어렵다던데.”
‘우리 애는 합격할 겁니다'라는 엄마 아빠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 당신들도 금시초문이면서. 분명 놀랐을 거면서. 아니, 진짜 믿었을지도 몰라. 어차피 본인들이 칠 시험도 아니었으니까. 딸이 시험은 곧잘 쳐왔으니까. 알아서 또 잘하리라 믿었겠지.
내겐 청천벽력이었지만.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어. 더 이상 활활 타지 않아도, 오히려 비를 흠뻑 맞아도 아름다울 날들이었는데. 그런 날들이 쭉 이어질 줄 알았는데.
꼭꼭 밟고 있던 재 속에 불씨가 남아 있었어. 새빨갛고 생명력 강한 작은 불씨가, 고개를 삐죽 쳐들고 나를 잊었냐고, 네가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겠느냐며 히죽거렸어. 더 이상 밟을 수도 없는 불씨. 차라리 활활 타올라야 할 그 불씨. 내가 자발적으로 키워야 마땅해 보이는 불씨.
감옥 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거야. 어째 이상하더라고. 이렇게 쉽게 탈출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어.
감옥과 한 발짝 가까워지도록.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과대표나 과행사 진행을 3학년이 맡고 있었어.
4학년 선배들이 보이지 않더라. 임용시험 준비로 다들 공부하러 갔대.
아.
시험.
감옥을 향해 또 한 발짝 뒷걸음.
자기소개를 핑계로 게임을 빌미로 모두들 얼굴이 불콰해졌을 즈음 어색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언니 오빠들이 있었어. 4학년들이었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들렀다면서 우리 사이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술을 한 잔 마시고 안주를 몇 개 집어먹고는 다시 나갔어. 공부해야 한다면서.
시험이 그렇게 어렵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어. 사실이었구나.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 이미 들어와 버렸는 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에 들어왔으니 그걸로 일단은 된 거다. 부어라, 마시자, 노래 부르자. 알코올을 처음 받아들인 몸은 순식간에 반응했어. 내 주량이 얼마나 적은 지도 그날 알았지. 나는 맥주 두 잔만 마시면 남들이 소주 두세 병 마셨을 때처럼 취할 수 있는 아주 가성비 좋은 주량을 가진 사람이었어. 돈도 없는데 이 얼마나 다행이냐. 부어라 마셔라. 나는 아직 1학년이다.
대학 수업은 지루했어. 중요하다는 전공 수업이 더더욱 그랬지. 두꺼운 책을 준비하라고만 해놓고 어느 페이지를 설명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천장만 보며 설명하는 교수님, 80년대에 출판돼서 이미 절판된 책을 구해오라는 교수님, 조를 짜서 단원별로 요약할 부분을 정해주고는 우리가 발표하는 동안 한 학기 내내 꾸벅꾸벅 졸던 교수님. 시험은 족보만 구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 족보 밖에서 나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시험이 반복되면서 사라졌어. 예상 문제에 대한 답을 적어서 달달달 외워서 시험지에 토해내면 끝. 절대 평가였던 전공 수업은 언제나 A 또는 A+이었고 상대 평가였던 교양 수업도 일주일 정도만 공부하면 그럭저럭 성적이 나왔어. 분량만 많을 뿐 고등학교 공부보다 더 단순하더라. 이렇게 쉽게 공부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취기의 알딸딸함에 매료되어서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셨어. 오늘 저녁엔 어디서 무슨 술을 마실까를 하루종일 생각했어. 처음 다니기 시작한 오락실에서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1945 2탄도 하루종일 머릿속에 맴돌았어. 깨지 못한 스테이지를 정복하기 위해 비처럼 쏟아지던 미사일의 규칙성을 찾았지. 펌프 게임의 스텝 순서를 인쇄해서 외우고 집에 가는 길에 확인하며 한 판 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어.
1학년 봄 MT 갔던 날.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로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러 혼자 밖으로 나갔어. 숙소 건너편 바다가 바다내음을 물씬 실어 보냈어.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휘청이며 바다를 향해 걸었지.
철썩철썩 파도소리가 가까워질 즈음 보이던, 어둠 속 작은 불빛 두 개. 선명하고 붉던. 마치 반딧불이 같던. 불빛을 향해 다가가는데 갑자기 하나가 바닥으로 추락하고는 사라졌어. 나머지 하나도 내가 가까이 가자 이내 사라졌어.
“너네 담배 피우는구나?”
동기 둘은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나도”하니까 둘이 동시에 “안 된다. 너는” 하더라.
“왜애..하나만 주라. 갚을게.”
콜록이지도 않았어. 취기는 감각을 마비시키니까. 고소한 보리차맛이었어. 술에 취할 때마다 고소함이 생각나서 한 갑을 사서 친구에게 맡겼어. 집에 들켰다가는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서로를 의식하게 된 동기와 사귀고, 헤어지고, 교양 수업에서 만난 선배와 사귀고, 헤어지고, 저녁에는 술, 친구 품에서 나오는 한 개비로 마무리하는 하루가 이어졌어. 꿈만 같았어. 엄마가 남았다고 하던 4년을 죽어라 살았더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아니 이런 날을 살아야 한다. 이런 날을 보내지 않으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오로지 노는데 혈안이 되었던 2년이 지나고 3학년이 되니 교육학 학원이네 전공 학원이네 다들 학원가로 빠졌어. 나? 나도 남들 하는 거니 나도 한다는 마음으로 학원을 다녔지. 교육심리, 교육행정, 교육역사 등등 과목명에 교육이 붙은 교육학 과목들을 보니 내가 교육이라는 걸 하며 살아가야겠구나 했어. 전공과목에도 국어교육학, 국어문법론, 현대문학, 고전문학 등 여러 분야가 있었지만 고3 때처럼 암기 위주로 공부했어. 깊이 있는 이해나 성찰 같은 건 없었어. 외운 걸 문제로 확인하는 날들의 연속. 다시 들어간 감옥은 예상외로 아늑했어. 한동안 벗어놓은 익숙한 옷을 다시 입은 듯 제법 잘 맞고 따뜻하기까지 했어.
첫해에 붙기 어려운 시험이라는 말은 굳은 믿음이 되어 꼭 들어맞는 주문처럼 나를 첫해에 탈락시켰어. 불합격에도 전혀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대부분이 그런 과정을 거치는 걸 봤기 때문이야.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혼자가 아니니까, 튀지 않으니까, 우르르 걸어가는 인파 속에 묻히니 전혀 특별할 게 없었지.
다음 해에 재수로 붙었어. 책 내용을 머릿속에 다 집어넣는 건 내 전문이었거든. 전공학원 모의고사 반을 끊으니 반복학습이 되어서 좋았어. 어느 페이지에 어느 부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조차 기억할 수 있었어. 강사가 낸 문제의 오류까지 잡아낼 수 있을 정도였지.
1차 필기시험에 제법 높은 점수로 합격하고 자신만만하게 2차 준비를 했어.
2차 시험 날 수업시연은 6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나만 바라보는 학생들이 서른 명은 있는 것처럼 뻔뻔하게 당당하게 했어.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을 데리고 학교놀이를 할 때처럼.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는 심사위원을 보며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했지. 배운 대로 로봇처럼 딱딱하게 진행하는 수험생만 보다가 이런 발칙한 수험생을 보니 기분이 리프레시해지지 않습니까? 물어보고 싶었어.
이어진 면접. 점잖게 양복을 입은 나이 지긋한 면접관이 펜대를 굴리며 물었어.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할 생각입니까?”
“담배를 피우는 무리의 대장을 잡으면 됩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어른보다는 또래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또래에서 힘을 가진 학생을 위주로 지도해야 합니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완벽한 답안인지. 뿌듯함이 밀려왔어.
면접관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굴리던 펜대가 멈칫하는 순간 깨달았지. 아, 잘못 답했구나. 이건 제도권 교육이 원하는 답이 아니구나.
면접관의 미간은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을 상징했어. 대학시절의 취기와 자유롭던 사랑과 수 천 개의 담배꽁초에게 이별을 고했지. 안녕. 나는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 감옥의 주인이 되어 교도관이 되어.
교도관의 마음으로 시작한 교직이었으니 특별히 더 잘할 것도 더 못할 것도 없이 지금껏 학생 위치에서 봐 온 선생님들 흉내를 냈어. 밑줄 긋기를 시키고 숙제를 내고 시험으로 협박하고 손바닥도 때렸지. 학생 손바닥을 처음으로 때리던 날, 면접관의 얼굴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내 깨달았어. 나는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숙제를 안 해온 아이가 왜 숙제를 못 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거든. 그 아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나면 차라리 숙제를 하지를 마라, 잘 먹고 잘 자고 학교에서 마음 편히 있거라. 부모라고 다 훌륭하지 않단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도 많단다. 그 선생님이 잘못한 거 맞아. 선생님도 실수를 한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
말할 수 없었지만.
음성 언어로 전달하는 건 소통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 사람의 진심은 눈빛과 행동과 손짓과 어조와 말투로 전달 돼. 아이들도 사람이라서, 나도 사람이라서 우린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음성이 아닌 것들로 마음을 나눴어. 물론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아이들도 있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학부모도 있었지. 하지만 대부분은 진심으로 다가가면 진심을 보여주었어.
교사라는 직업은 결코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지만, 엄마의 꿈이었지만, 이 직업에 발을 들여서 내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건 분명해. 많은 곤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태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이 꿈을 내 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야. 내 꿈으로 만드는 과정은 별 게 없었어. 그저 맡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내가 적어도 ‘맡은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았다는 거야.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난 태생이 게으른 인간이지만 맡은 일을 안 하고는 못 베기거든. 남들에게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스스로가 용서 못 해.
맡은 일을 하는 시간이 1년이 되고, 5년이 되고, 10년이 넘어가니까 어느 순간 이 업종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알 수 있게 되었어. 한결 마음이 편해졌지.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대충은 보이니까.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다른 교사를 돌볼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더라.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어.
교사가 내 꿈이라고.
그리고 또 말할 수 있지.
교사가 아닌 그 어떤 직업을 가졌더라도 맡을 일을 해내면서 10년 이상을 보냈다면 그게 내 꿈이 되었을 거라고.
내 아이들에게 나는 꿈을 묻지 않아. 학생들에게도 꿈을 묻지 않아. 어떤 꿈을 가지라고 말하지도 않아. 어떤 길을 가든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그걸 이겨내면서 꿈을 가지게 될 거니까. 차라리 하루를 잘 보내고 푹 잘 자면서 하룻밤동안 행복한 꿈나라를 여행하길 바라지.
희수야.
나도 몰랐어. 희수가 모를 때 나도 몰랐어.
희수가 꿈을 만들어가는 도중에 겪었을 불안을 나도 당시엔 겪고 있었어. 우리가 보낸 10대는, 20대는 그런 시간이었으니까. 작은 발 하나 디딜 곳 하나 없어 보이는, 손 하나 뻗기에도 위태로웠던 마음. 그 마음을 홀로 견뎌내는 건 참 힘든 일이었어.
희수도 많이 힘들었지.
언젠가는 만나는 날이 오면 네가 꿨을 꿈을 들려줄래. 나는 꿈을 이뤘을 너를 상상해 볼게. 분명 눈부셨을 네 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