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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Oct 03. 2022

운전의 세계

#초보운전 #배려 감사합니다

많은 여성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주었던 미니시리즈에서는 여주인공이 곤란에 처했을 때마다 츤데레 남주인공이 번쩍번쩍한 스포츠카를 끌고 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말하곤 했다. 


"야 타!"


그때부터였을까.. 초등학생 때부터 온갖 미니시리즈를 섭렵했던 나는 저 멋진 남주처럼 나의 지인들(?)이 곤란에 처했을 때, "야 타!"를 할 수 있는 멋진 신여성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는 겁이 너무 많았고, 백수 시절 간신히 면허를 따긴 했지만 운전면허학원 선생님께 어디 가서 자기가 합격시켜줬다는 얘기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운전은 나에게 항상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부터 대중교통으로는 절대 다닐 수 없는 새 직장에 출근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운전의 세계에 던져지게 되었다. 차를 구입하는 것부터 중고차를 살 것이냐 새 차를 살 것이냐 고민이 많았는데, 자신이 타던 중고차를 나에게 비싸게 파려던 사촌언니에게 기분이 팍 상해 새 차를 사버렸고(?) 차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한문철 TV 구독도 하며 본격적으로 운전에 임할 마음가짐을 다졌다. 


처음 한 달간은 극성맞은 엄마와 삼촌이 함께 출퇴근을 해주었다. 내가 운전을 하기는 하지만 조수석에 운전 고수들이 앉아있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29세 여성의 출퇴근길에 매일 엄마와 삼촌이 동행하는 것이 멋진 신여성과는 좀 거리가 멀기도 했고, 회사에 대학생 친구들도 혼자 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에 오기? 자신감? 이 생겨 출퇴근 동행 졸업을 선언한 후 진짜 리얼 쌩 운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 한 달간은 어찌나 몸에 힘을 많이 주고 운전을 했는지 차에서 내리면 손에 전기가 오를 정도였다. 나름 또 노래는 듣고 싶어서 볼륨 20으로 듣고 다녔는데, 남자 친구가 노래가 들리긴 하냐고 놀리기도 했다..흡.. 무튼 매일 왕복 50킬로를 3개월 동안 운전해보니 이제 나름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도 볼 수 있고, 얼마 전에는 클락션도 울려봤다.(클락션 소리가 너무 앙증맞아서 창피하긴 했지만)


운전 4개월 차에 이런 말 하는 거 웃기는 거 알지만.. 운전의 세계에도 희로애락이 다 있는 것 같다. 혼자 운전하는 첫 퇴근길에 지하차도 진입 후 바로 차선 변경을 해야 했는데, 끼어들기를 못해서 지하차도를 나가게 되었다. 지하차도 옆 아파트를 한 바퀴 돌고 재진입을 했지만 다시 끼어들기를 못해 또 나가야 하나 할 때, 어떤 차가 나를 위해 속도를 줄이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ㅜㅜ 비상 깜빡이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나도 다른 차들을 배려해줄 수 있는 차주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그 다짐도 잠시.. 내가 무리하게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끼어주었지만 감사인사 하나 없는 차들, 초보운전 딱지 때문인지 꼭 내 옆에 붙어서 끼려고 하는 차들로 인해 점점 혼잣말이 거칠어졌다. 


그러다 며칠 전 나와 같은 차종에 같은 색깔인 차와 비상 깜빡이로 인사를 한 날, 출근길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행복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퇴근길, 차가 너무 막혀 창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보라색 노을이 지고 있을 때.. 갑자기 지난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그래 이게 진짜 내가 꿈꿔왔던 신여성의 퇴근길이지..' 하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0분의 출퇴근길, 나는 운전의 세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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