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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솔 Jan 22. 2024

증오를 먹고 자라는 내편 문화

산골일기 오십다섯번째

”좀 더 깊이 찔러서 확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

”그러게 말이야... 에이 운도 없지 “ 

목욕탕에 둘러앉은 중장년 사내들의 이야기에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당 대표가 백주 대낮에 살해당할 수도 있었던 테러가 일어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격적 성향이라곤 눈곱만큼도 묻어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하고 순박한 농부들의 얼굴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이곳이 아무리 ’ 빨갱이는 북으로 돌아가라 ‘라는 시대착오적 현수막이 버젓이 나풀거리고, 텔레비전에 야당의원 얼굴만 나와도 ”꺼삐라. 재수 없는 빨갱이 새끼들! “이라는 대갈일성이 터져 나오는 찐 보수 지역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대화 수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섬뜩한 말을 들으며 마음 깊은 의문 하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의 가슴속에 도사린 저 말할 수 없는 증오와 미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 야당대표가 그들 집안의 철천지원수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더 나아가 어쩌면 단 한 번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직접  얼굴을 대면해 본 적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칼에 찔려 죽었으면 좋았겠다는 철천지원수를 향한 폭언보다 더한 거침없는 

저주와 증오는 정말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968년 미국 아이오와주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작은 실험이 진행되었다. 

당시 교사였던 제인 엘리엇은 인종 간 편견과 차별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교육하고자 했다. 그녀가 한 실험은 매우 단순했다. 

아이들을 갈색 눈과 푸른색 눈으로 구분하고 은연중에 푸른색 눈 아이들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며 그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도록 갈색 눈 아이들의 머리에는 수건을 쓰게 한 것이 전부였다. 

실험은 그렇게 단순했지만 그 결과는 교사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엄청났다. 

그룹을 나눈 지 채 15분이 지나지 않아서 서로 친밀했던 아이들끼리 폭력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파란색 눈의 아이들은 조금 전까지 부르던 친구의 이름 대신 ”어이 갈색 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갈색 눈의 아이들은 그것을 자신을 향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며 폭력을 휘둘렀다. 

이 실험은 반대로 갈색 눈의 아이들이 우월하고 파란색 눈의 아이들이 열등하다고 서로 위치를 바꾼 후에도 여전한 폭력과 갈등을 증폭시켰다. 

훗날 실험대상자들은 그 사건이 자신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고백하며 편견과 차별을 배척하는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 실험이 밝혀낸 사실들이 시대의 증오와 편견을 모두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제인 엘리엇의 실험 속에서 이 시대의 증오와 폭력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의 단체나 지역에 소속되고 나면 그 반대편을 적대시하며 그들을 무찔러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다는 자기 방어기제를 본능적으로 발행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씁쓸한 결론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수밖에. 소위 내편 문화에 사로잡히고 나면 상대방은 어떻게 되어도 좋은 도덕적 마비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목욕탕에 둘러앉은 사내들의 이야기가 일견 해석될 것도 같다.  

   

예전 직장에 있을 때 ’ 우꼴좌빨‘이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간혹 업무 스타일에 따라 우익 꼴통이냐 좌익빨갱이냐 라는 구분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분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구분은 정치적 토론만 아니면 일상에서는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작은 차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양극단의 간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자기 신분을 우꼴인지, 좌빨인지 희화화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금에 이르러 두드러지고 있는 간격의 심화는 무엇 때문일까? 

혹자는 듣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는 유튜브의 알고리즘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지지하는 대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확증편향이 문제라고 말한다. 일견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생각이나 가치관이 한쪽으로 기울고 나면 돌이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이다. 

하루 종일 자기 생각에 맞는 것 같은, 소위 자기편 이야기만 듣고, 보고, 말하니 생각의 기울기가 점점 더 가팔라진다. 그 기울기 속에서 어떻게 객관적 중립성을 유지하며 냉철하게 자신의 보편성을 저울질해 볼 수 있겠는가! 이미 경도된 뇌는 자기 생각과 다른 그 어떤 사실이나 증거도 모두 튕겨내 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언젠가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졌다가 가까스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얘기 속에서 보편적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허무맹랑한 교리에 빠져서 광신도가 되는 과정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교리와 반대되거나 다른 정보가 모두 차단된 채 특정교리가 지속되면 어느 시점에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보편적 상식과 가치가 보편성을 잃어버리는 증상이 나타나게 된단다. 예를 들어 ’ 폭력은 나쁘다 ‘는 보편적 가치가 교주를 위한 것이라면 거룩한 선행으로 둔갑된다. 거짓은 거룩한 지혜로 탈바꿈되고, 성적인 문란조차 거룩한 교접이 되고, 재산의 헌납은 세속을 벗는 가장 고귀한 행위로 포장된다.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사이비 종교를 빠져나오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었다고 한다. 치우침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자 폭력과 거짓과 성적 문란함이 있는 그대로의 민낯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미망에서 깨어난 듯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어리석은 폭력과 기만과 왜곡을 반성하며 부끄러워했다. 


지금 이 사회는 내편문화의 양극화로 인한 증오가 괴물처럼 자라고 있다. 

심각한 것은 증오가 증폭되기 시작하면 진실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현실이다. 증폭된 증오는 진실이든 가짜든 상대를 깔아뭉개고 이기는 수단과 방법만을 찾아 기울어진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거짓 뉴스를 양산하고, 자기편의 증오심을 부추길 수 있는 자극적 단어와 문구를 양산해 낸다. 마치 누군가 하나 죽어야만 끝나는 치킨게임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질 낮고 더러운 에너지를 동력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세 결집을 위해 거짓과 진실을 가리지 않고 군중을 선동하고 부추긴다. 

국민을 자기 손에 들린 한낱 연장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손아귀에 길들여 나간다. 무섭고 야비한 일이다.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라는 말을 믿고 싶지 않지만 현실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이미 경도된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생각들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혼란을 만들고 왜곡된 정의를 양산해 낸다. 자기 이득을 위해 왜곡된 사실로 우민화를 일삼은 사악한 정치 엘리트 군단들의 시대가 언제쯤 마감될 수 있을까? 아득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야만의 시대가 생각보다 더 오래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의 홍수를 만들어내는 인터넷의 발달이 오히려 이 야만의 시대를 지속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의 범람이 사람들의 이성과 정서를 마비시키며 거짓과 왜곡의 웅덩이에 더 많은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정말 시대가 어둡다.      


나는 일찍이 댓글 피해를 경험하며 한 사람의 멘털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절실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왜곡된 정보에 현혹된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내지르는 말들이 또 다른 동력이 되어 무차별한 폭력으로 가해지는 것을 생생하게 견뎌내야 했다. 

그 지독한 폭력은 내가 그 조직을 떠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나는 그 조직을 떠나면서 세상에 천벌 받을 인간이 있다면 가짜 뉴스를 만드는 인간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 폭력을 일삼는 인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당 사실이 아닌 일로 내가 겪어야 했던 모멸감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도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익명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그 놈들이 누구였는지? 

왜 그랬는지? 답을 듣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 깨닫는 것은 그들은 과거 자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할 거란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서 누군가의 감성과 인격을 그토록 아프게 파괴했는지 전혀 모를 거란 사실이다. 

이미 돌처럼 굳어버린 이성의 마비가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해석의 여지조차 망각의 늪에 빠뜨려 버렸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잘못된 가치관과 신념으로 세뇌된 사람일 것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소중한 한평생의 삶을 모두 소진시킨 사람보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제발 어떤 생각이 당신의 머리와 생각과 감정을 돌처럼 단단히 굳히기 전에, 비록 고통스럽고 내키지 않더라도 다른 생각, 다른 가치관에도 귀 기울여 보기를... 하나의 생각이 당신의 머릿속에 돌덩이가 되어 요지부동이 되기 전에, 무슨 말도 어떠한 사실도 당신이 원하는 생각에 맞지 않으면 튕겨버리는 괴물이 되기 전에 말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왔던 가치관에 금이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스스로 보편적인가 아닌가? 보편적 양심에 옳은 일인가 아닌가? 물어보는 습관이 회복되면 좋겠다. 

장발장을 끔찍한 범인으로 여기고 그의 처벌이 정의의 구현이라 철통같이 믿었던 형사 자베르의 인생을 생각해 보라. 그는 자기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그동안 자신을 지탱했던 삶의 기반이 순식간에 꺼지는 고통에 함몰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생을 다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후회 속에 자기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비극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믿든,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 있건, 어느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든 보편적 가치관의 중립에 서서 비록 제 편이라 할지라도 그릇됨을 과감히 지적하고 인정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의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 줄 수 있는 포용력의 여유가 넘치는 그런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 어둠으로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으로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으로 증오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틴루터킹 목사의 말이다. 

편 가르기 문화 속에 자신도 모르게 미움과 증오로 뭉쳐진 야만의 가슴속에 던져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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