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다시 열며

내 이름을 아시나요...?

by 들꽃 deullggott

여러 군데의 SNS에서 놀면서 쓰는 이름들이 다양하다.

그중에서 내가 오래도록 애정하고 즐겨 쓰는 닉네임은 "deullggott" 이다.


들꽃.


나처럼 내향적이면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어지간하면 다 달고 다니는 이름표다.

하지만 그 이름은 실제 들꽃만큼이나 많고도 많아서 막상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어딘가 문을 열고 들어가 이름을 말하려 하면 이미 누군가 먼저 들꽃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영어식 표기였다.

'들'을 표현하려면 단순한 'dl'이 있고 조금 긴 'deull'이 있다.

전자는 나중에 떠오른 거였고, 난 처음부터 후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게 맞는 들은 deull이다.

왠지 너른 들판처럼 넓게 깔려 있으면서도 뭉툭하게 잘리지 않고 여운이 남는 발음까지.

들. 이 아닌 드으으을. 의 느낌.

편만하면서도 흙의 내음이 스며 있을 것 같은 느낌.


내가 이십 대일 때,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한 살 위의 언니가 내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랬었다.

"음... 너는 들판 같은 여자야.

산이나 바다처럼 뭔가 강렬하게 매력을 어필하진 않지만,

조용하고 뭉근하게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지.

사람들이 너한테 와서 쉬다가 다시 산이나 바다로 떠날 수 있을 거야."

젊은 날의 나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화가 났다.

왜 나는 산이나 바다가 될 수 없는가.

내 매력은 왜 강렬하지 못하고 뭉근해서 다른 이들을 휘어잡을 수 없는가.

일 년밖에 날 보지 못하고선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 언니가 얄미웠다.

세월이 흐른 지금, 아니 조금 오래된 과거부터는 언니의 말에 매우 크게 동조한다.

사람들이 내 곁에 와서 쉬곤 힘을 얻어 다시 떠나는 일들이 실제로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이 어쩌면 나의 존재 이유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떠나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있을 만큼 힘을 얻었다는 것이 고마워진다.

비록 내 곁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발걸음을 축복하리라, 웃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체념인지 인정인지 혹은 소위 득도의 경지에까지 오른 건지는 사실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이제는 많이 슬프지 않다.


어쩌면 흙의 습함도 이런 눅눅한 슬픔이 배어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꽃들을, 생명들을 살리는 것들엔

나의 눈물과 너를 향한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건 아닐까.

겉으로 드러나는 슬픔이라기보다는

안으로 안으로 말아 올려져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슬픔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피부나 세포에 새겨져 있는 슬픔이 있어서 가능한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을 아주 단순하게 '담즙성 우울 기질'이라 표현하겠다.

투명하고 맑은 눈물이 아니라 뭔가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알갱이가 만져지는 눈물 같은.

젊은 날엔 이유도 모르고 울었다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선 그런 나를 숨겼고 지금은 이런 나를 보듬는다.

나스러운 나를 마음과 말로 인정하고 시인할 뿐만 아니라 껴안고 함께 걸어가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러고 있는 중이다.

단단한 줄 알았던 눈빛이 여전히 자주 휘청이고 작은 사건 하나에도 휘둘린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런 나조차 끄덕이며 봐줄 수 있는 인내심이 생겼다.


이런 나를 칭찬한다.

내가 어떠하다는 결과 때문에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어떠하다는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태도를 칭찬한다.

그래... 이왕이면 죽을 때까지 촉촉한 슬픔을 소유한 흙이길, 너른 들이길.

아마 예전만큼 글이 써지지 않은 이유는

이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0센티쯤은 땅에서 떨어져 허공을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사는 게 바빠서 그 슬픔을 다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런 건 아닐까,

그렇게 핑계도 대 본다.

아니면 거꾸로,

사는 게 예전보다 편해져서 나의 슬픔에 무뎌진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해결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때는 간절한 절박함이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랄까.




deullggott.


편만하고 촉촉한 드으으을(deull)에 핀 꽃들은 어떤 것들일까.

꽃을 표기하자니 문득 kk와 gg가 떠올랐다.

ㅋ ㅌ ㅍ ㅊ 같은 격음은 '숨이 거세게 나오는 음'이고, ㄲ ㄸ ㅃ ㅉ 같은 경음은 '근육을 긴장하거나 폐쇄 과정을 통해 나오는 음'이라고 한다.

같은 센소리여도 격음은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이 들고, 경음은 격음에 비해 어딘가 애교스러운 부분이 있다.

기질적으로 타인에게 센 것보다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폐쇄의 자리로 들어가는 나로서는 어릴 때부터 왠지 격음보다는 경음에 끌렸다.

그것은 강렬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보다는 땅속의 세상을 더 넓히는 씨알을 닮았다.

흙 밖의 세상에선 화려하지 않을지라도 흙 속의 슬픔을 이해하고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만 있기엔 취약하다.

동굴은 있되 바람 한 점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하다.

나만의 공간은 필수적이지만 창문 하나는 있어서 자발적인 소통이 있어야 한다.

물속 나만의 세상에서 오래 잠수하다가도 한 번씩은 뭍으로 나와 사람을 구경하고 온기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나는 살아갈 수 있다.

결국 내 세상과 너의 세상이 적절하게 만나고 조화를 이뤄야 나는 행복을 느낀다.

땅 속 꽃'들'인 gg와 땅 밖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꽃'들'인 tt를

서로 손잡게 하고 같이 살아가게 하는 중재자 o의 도움으로 그제야 모두가 함께 빛나는 꽃들이 된다.


처음 이름을 지을 땐 거의 무의식적인 발상이었다.

들꽃이 좋은데 들꽃이 너무 많아 생각한 꼼수였다.

그냥 발음을 생각하며 지은 끌림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하며, 나의 무의식적인 선택에서 나를 발견하곤 피식 웃을 때가 많다.


지극히 내향적이지만 누군가를 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보통 땐 부끄러움이 많지만 그 이면엔 열정도 많다는 것,

현실보다는 이상을 중요시한다는 것,

푸르고 맑기만 한 하늘보다는 땅에 묻힌 수많은 것들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

번듯하고 똘똘해 보이는 모습보다는 후줄근하고 눅눅한 눈빛이 더 걸린다는 것,

혼자 열심히 달려가 우뚝 서는 것보다는 서로 손잡고 밀어주고 당겨주며 걸어가는 공동체를 좋아한다는 것,

자잘해 보이는 너와 내가 세상 구석에서 혹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서로 응원하며 돕는 걸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는 것,



그런 gg와 tt들이 모여 무채색의 deull을 밝힌다.

비로소 따뜻하고도 빛나는, 반딧불이들의 유영 같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잔잔하게 웃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들꽃이다.

나를 닮은, 아니 나이기도 한 수많은 꽃들이 일어나고 피어나 내 이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광야의 들꽃은 아니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던 지인은 들꽃이 아니라 베란다꽃이라고 웃어주었다.

세상 풍파를 다 맞아도 의연하게 살아남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차마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고 베란다에서 밖을 동경하는 꽃이라는 의미다.

처음엔 발끈했지만 이내 수긍하였다.

그래, 내 인생이 이만하면 무난했다.

때론 아픔도 슬픔도 어려움도 고난도, 그런 눈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밀리고 몰려 나를 완전히 포기할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구석에서 소리도 없이 많이 울었어도,

아직도 난 숨을 쉬고 있고 지금을 누리고 있다.

대문자 하나 없이,

크게 빛나지도 크게 고통스럽지도 않은,

편만하면서도 눅눅한 슬픔 정도를 가지고 산 꽃생이었다.

그러니 난 베란다꽃이면서도 들꽃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들꽃이라기보다는,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deullggott인 것이다.


"대표명사 들꽃에서

고유명사 deullggott 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자잘함들이 모여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이름, deullggott.

빛나는 것 하나 없을지라도 서로서로 보듬어주고 안아주며 잔잔한 행복을 누리는 저 알파벳들의 공동체, 혹은 나의 일생.

아마도 난 나의 'deullggott'을 오래도록 사랑하고 사용할 것이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꽃, 향기는 오롯이 내 몫이다.





(( deullggott 으로 오래 놀아서 이 이름이 내 실제 이름보다 훨씬 편하다.

아마도 나를 한참 파며 글을 쓸 때 이 이름표를 걸어 놓아서인 듯.

글을 쓰다가, 가끔 되묻는다.

내가 누구였던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가, 하고.

나를 벗어나려 노력도 하지만 나를 받아들이는 노력도 한다.

그도 저도 다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