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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마음 Sep 09. 2023

나의 새로운 롤모델이 된 <오펜하이머> 감상기

포스터만 보면 무슨 지옥에서 올라온 매드사이언티스트 같다

(스포주의 + 장문주의)


1. 케임브리지의 방황과 괴팅겐에서의 활약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대학원 유학 시절 지도교수와의 불화 + 적성에 안 맞는 실험물리학 공부 때문에 향수병과 우울증이 극심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과에 독을 넣어서 지도 교수를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하니 정신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알만하다.

    

오펜하이머는 닐스 보어의 권고를 듣고 케임브리지를 떠나 괴팅겐으로 가서 이론물리학과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쪽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아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부분에서 닐스 보어의 대사가 너무나 와닿았다.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대수(Algebra)는 악보와 같은 걸세.
중요한 건 음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가야.


오펜하이머는 계산과 실험물리학에는 서툴렀지만 핵심 개념을 꿰뚫어보는 이해력과 통찰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괴팅겐대학교는 당시 양자 역학 이론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곳이었는데 닐스 보어의 이러한 권유 덕분에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곳에서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

    

맥스웰, 러더퍼드, 보어, 왓슨, 크릭으로 대표되는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의 실험물리학 학풍 아래에서는 시들시들 죽어가던 그가, 이론만을 다루는 괴팅겐에서는 말그대로 물만난 물고기처럼 공부하여 9개월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따는데 보통 4년 정도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천재가 노력을 했다’의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가 이론물리학자로서 세운 업적은 핵폭탄을 만든 것 외에도 블랙홀의 예측이 있다. 별이 죽으면 밀도가 커지고 → 중력이 커지고 → 더더욱 밀도가 커지고 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다가 중력이 너무 커서 빛까지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 예측을 한 것이다. 관찰을 하려면 빛을 내야 하는데 블랙홀은 빛 자체를 빨아들이니 관측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천체였는데 이론물리학의 힘으로 그 존재를 수학적으로 예견한 것이다.

    

어쨌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오펜하이머의 이러한 청년기 서사는 내가 겪었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서 영화 초입부터 깊이 빠져들었다.

    

초6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꺼내본 경락에 대한 책을 계기로 한의학에 매혹되어 한의사가 되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경험하게 된 회사 생활 + 본3 때부터 예감했듯이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임상가의 세계에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애를 쓰다가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한의학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이지 한의학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내게 상극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한의학 = 한의사 = 임상한의사”의 구도만 있었지 기초 연구, 특히나 원전의사학적 연구나 생물에 대한 실험연구가 아닌 수학과 코딩, 계산과 시뮬레이션, AI와 데이터과학을 도구로 한의학을 연구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전혀 몰랐던 것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지금 소속된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연구 방법론들은 너무나 매력적이라서 회사 생활, 한의원 생활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지도 않고 매일매일이 즐겁다.

오펜하이머가 음미한 중성자의 세계

타닥거리는 불꽃의 잔불을 보면서 ‘입자의 음악을 듣는’ 오펜하이머의 모습, 불꽃과 입자의 움직임이 교차되는 그 연출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2. 다양한 분야에 해박한 다능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미국 뉴욕 태생이지만 6주 동안 공부해서 네덜란드어로 물리학 강의를 할 만큼 외국어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산스크리트어도 읽을 수 있어서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원문으로 읽고 곧바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동서양의 고전문학과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도 조예가 있는 듯한 장면들이 나오고,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공산주의에도 지적인 관심을 가지는 등 사회, 정치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자기 분야에만 골몰하는 외골수가 아닌 풍성한 관심 분야와 넓은 범위의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오펜하이머를 묘사하고 있다.

    

나중에 맨해튼 프로젝트에서도 정부 관계자나 군인 장교들과도 소통하고, 많은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하고 이끄는 과정에서 카리스마와 지성을 겸비한 리더의 면모를 보여준다. 게다가 핵폭탄을 만드는 데에도 크게 일조했지만, 전쟁 이후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인 활용을 위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과학자라고 하면 흰 가운을 입은 채로 실험실이나 서재에만 처박혀서 책만 들이파고 실험기구만 만지며 자기 분야가 아니면 아주 상식적인 것조차도 모르고,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심리적인 지식이나 스킬은 부족한, 일반인들과는 대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깨부수는 오펜하이머의 파격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 같이 등장하는 리처드 파인만도 대중과의 소통에 능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방향이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과학자의 모습이다.

    

3. 소인배 스트로스 vs 대인배 오펜하이머

    

미국 원자력위원회 의장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공적인 자리에서 굴욕을 주었던 것에 앙심을 품었다. 그런 악감정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과 자신을 이간질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모함한 동기는, 핵폭탄의 등장으로 인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스트로스는 생각한다. (오펜하이머가 딱 자기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러면서 “대체 그때 아인슈타인에게 뭐라고 속닥거렸길래 아인슈타인이 날 쳐다보지도 않게 만들었는지” 미치도록 궁금해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지만 그때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에게 ‘스트로스’라는 이름을 꺼내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인슈타인에게 했던 말을 풀어서 표현하면 이렇다.

    

“비록 핵분열 자체의 무한 연쇄반응은 가능성이 0에 가깝지만 여러 나라들의 핵무기 경쟁이 세계 멸망으로 이어지는 ‘파괴의 연쇄반응’은 이미 시작된 것 같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300년 역사와 자신이 쌓아온 업적들이 어둡고 암울한 미래를 현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스트로스의 인사를 씹고 어두운 표정으로 지나쳐간 것이다.


스트로스와 오펜하이머

즉, 당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모두에게  스트로스는 out of 안중이었다. 그러나 스트로스는 이때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모함했다고 오해해서 그에게 공산주의자 패러다임을 끈질기게 씌우며 괴롭힌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괴롭힘을 오펜하이머는 의연한 모습을 견뎌낸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를 지지하는 다른 과학자의 고발로 인해 스트로스는 제대로 참교육을 당하게 된다.

    

많은 창작물에서 ‘권력자에게 실컷 이용하다가 토사구팽 당하는 과학자’ 구도가 자주 보인다. 학문 자체에는 뛰어나고 똑똑한 과학자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인간 사회의 암투에는 어두워서 허무한 비극을 맞는 결말은 학자 성향이 강한 내게는 영 씁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스트로스는 비록 사회생활과 권모술수는 만렙이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오펜하이머를 오해하고, 자신의 사회적인 명망과 영달에만 집착하며,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오펜하이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치졸한 복수를 하는 등 소인배로 그려진다.

    

반면에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이면서,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여러 사람들을 조직해 핵폭탄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어 전쟁을 빠르게 종식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업적으로 인해 위협 받게 된 인류의 미래로 인해 고뇌하는, 복잡하지만 대인배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구도가 내게는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즐겁게 느껴졌다.

    

4. 계산신경과학과 사상심학

    

오펜하이머가 당시에 전공했던 이론물리학 & 양자역학의 특성을 살펴보면 내가 대학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계산신경과학 & 사상심학과 묘하게 비슷한 구도를 이루는 것 같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Theory takes you only so far)"이라는 대사가 자주 나오는 걸 보면 당시에 이론물리학은 실험물리학에 비해 위상이 낮았던 것 같다. (컴퓨팅 파워와 AI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당대 최고 석학이었던 아인슈타인조차 부정했던(”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굉장히 기묘하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학문으로서 당시 학계에서는 상당히 낯설고 비주류의 학문으로 그려진다(오펜하이머의 첫 수업에 참여한 학생이 달랑 1명이었다).

    

내가 진학한 대학원의 주요 주제인 계산신경과학도 이론물리학과 유사한 특성이 많다. 실험이 아닌 수학과 코딩을 이용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뇌를 연구하는 것이니 실제 뇌를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기존 뇌과학의 연구 방법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내가 생각하는 태소음양인의 이미지 @Midjourney

또, 사상의학은 전세계에서 한국의 한의사들만 알고 있는데, 심지어 모든 한의사들이 다 사상의학을 잘 알고 임상에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상심학은 정량화가 쉬운 체형사상이나 증상(소증)과 약물 반응을 위주로 체질을 파악하는 방식과 달리, 한의원의 임상 현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환자의 체질을 판별하는데 있어 활용도가 낮다.


그래서 성이니 정이니 하는 사상심학을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사상의학을 임상에 활용하는 한의사들 중에서도 또 일부이다. 즉, 사상심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오펜하이머 시절의 양자역학보다도 훠월씬 비주류 학문인 셈이다.

    

하지만 사상심학의 내용은 뇌과학, 심리학, 인지과학, 상담심리, 진로, 교육(공교육, 가정 교육), 인사(회사의 팀빌딩, 정부의 인사 배치), 자기계발, 인간관계 스킬(남녀, 일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적절하게 활용될 때 엄청난 포텐셜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공보의 때 잠깐 깔짝거린 상담심리학에서도 보면, 제1학파인 분석심리학(프로이트, 융 - 꿈의 해석), 제2학파인 개인심리학(아들러 - 미움 받을 용기),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빅터 프랭클 -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 여러 학파와 흐름이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그 어느 학파에서도 단일한 상담방법론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을 하지, 동일한 증상과 질환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없다.

    

사물과 사람을 4가지로 크게 나누어 보는 사상심학의 관점은 타인과 자신이 왜,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게 해주므로 메타인지를 높여준다. 하나의 단일한 체계, 논리, 원칙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생각에 익숙한 서구권의 학문 전통에서는 나오기 힘든 다양성과 병존, 장하석 선생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다원주의의 철학이 사상심학에 담겨있다.

    

사상심학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전세계의 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인 수학, 컴퓨터, 과학의 언어로 번역해 풀어낼 수 있다면 사회 각 영역에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핵폭탄은 전세계에 물리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지만, 사상심학은 사람의 내면과 인간 사회 전반에 정신적이고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펜하이머가 보여주는 멋진 모습과 그가 전세계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고 종횡무진하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장면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웅장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전까지 내가 가장 많이 나 자신을 투영하고 로망으로 삼았던 근현대의 학자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었는데 이제 NNSM lab에 진학해서 한의사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고 있는 현상황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훨씬 더 가까운 롤모델로 느껴진다.


중절모 간지 제대로 보여주신다


지금은 삐약거리는 석사 1학기 신입 나부랭이에 불과하지만 지금처럼 뭣도 모를 때가 오히려 이런 웅대한 꿈을 품을 수 있는 시기인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이루는 건 어렵더라도 포부는 크게 가지는 게 좋다고 보는데 호연지기와 큰 포부를 품게 해준 아주 좋은 영화였다!


+) 인생 최초로 영화관에 혼자 가서 본 영화였는데 옆에 누가 없으니 완전히 영화 내용 자체에만 몰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5분 지각해서 앞부분을 못 본데다가, 인물 이름들이 너무 한꺼번에 많이 나와서 놓친 대사들이 많은데 다음에 IMAX로 한번 더 혼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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