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무더운 여름날, 아이즈매거진(eyesmag)의 게시물에서 이찬혁이 신규 앨범 [EROS]를 발매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의 지난 앨범 [ERROR]의 타이틀 <파노라마>를 신선하게 들었고, 특히 청룡영화제에서 샴페인을 들고 나타난 축하공연에서는 일종의 해방감까지 느꼈던 터라, 이번에는 어떤 색깔을 음악에 녹여내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지하철 승강장의 구석진 의자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며, [EROS]의 타이틀 <비비드라라러브>의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빛나는 눈으로 너는 말했지 Vivid lala love"
짤막한 후렴을 스치듯 지나 신디사이저가 흘러 나오면서, 서서히 음악에 흡입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시야가 가려지고, 소음이 멈추었다(노이즈캔슬링 탓이겠지만). 몰입도는 거의 백퍼센트 가까이 도달했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대답은 예스. 다만 나에게 '초집중 모드'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데, 음악을 감상할 때는 거의 처음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는 사이 열차가 속도를 줄이며 승강장에 도착했다. 곧이어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이어폰과 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열차가 왔네." 하는 느낌은 또렷하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거나 어깨를 움찔할 수도 없었다. 몰입된 감각은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금세 사라져 버리고, 끈질긴 방문판매원과는 달리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4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마도 나는 냉동된 음식처럼 딱딱하게 굳어 보였을 것이다. 열차는 굉음을 내며 승강장을 떠났다. 나는 그 뒤에 도착한 열차 한 대를 더 보내서야 집에 들어갔다.
바로 다음 날에, 업무차 서울에서 파주까지 왕복 4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를 운전하게 됐다. 나는 이미 이찬혁의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비비드라라러브>를 틀었고, 운전하는 내내 반복 재생을 풀지 않았다. 다른 곡으로 바꾸지 않았고, 한순간도 멈추지도 않았다. 음악이 도착지를 찍으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와 거래를 할 때처럼 나는 <비비드라라러브>의 재생시간 속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멜로디를, 그러고는 점점 익숙해진 가사를 흥얼거렸다. 평소 멜로디 위주로 음악을 감상하는 편이라 가사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쉬지 않고 60번 정도 듣다 보니 가사가 안 들리려야 안 들릴 수가 없었다. 가사를 곱씹다 보니 곡에 담긴 상황이나 메시지 같은 게 슬슬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하, 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비비드라라러브>의 가사 해석을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차 안에서 온종일 그렸던 이미지와 그들의 생각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물론 사람마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 이찬혁도 청자에 따라 제각기 다른 해석을 독려하며 음악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공통된 의견과,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내 소견이 어긋나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찝찝했다. 팝콘을 집어 먹은 뒤 손가락을 씻지 않은 채로 영화를 마저 봐야 하는 느낌처럼.
우선 <비비드라라러브>의 내용을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화자인 '나'에게는 어느 친구(이하 A)가 있고, 그는 '비비드라라러브'라는 일종의 이상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환상을 품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비비드한(선명하고 강렬한) 사랑일 수도 있고, 광범위하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일 수도 있다. 그런 A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하고, 나는 얘기한다. 비웃는 느낌보다는 애정 어린 충고에 가깝다. 그런 이야기다.
불특정 다수의 공통된 해석의 키포인트는 비비드라라러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사실로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4시간 동안 뼈저리게 들으면서 한 번도 그런 쪽으로는 해석되지 않았다. 비비드라라러브의 실재 여부는 A와 나, 누구도 알지 못하며, 알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데올로기의 발견은 노력의 정도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관점 차이, 혹은 믿음에 관한 노래로 보았다. 화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비비드라라러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다만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군. 생각일 뿐이니까. 단지 비비드라라러브를 열렬하게 믿고 좇았던 네가 슬퍼하고 좌절함에 안타까운 마음이야. 그런데 있잖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에 하나 비비드라라러브가 있다면 그건 어디에 있을까?"
현실주의자인 나는 "무지개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무지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양가감정을 지닌 인물인 것이다.
[후렴]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빛나는 눈으로 너는 말했지 Vivid lala love"
[1절]
"무엇에 분노했었나 친구여 처음부터 그럴 만한 게 없었지
유감스럽게도 나의 친구여 도둑 든 상자를 찾는 꼴이었다네"
→ A는 비비드라라러브를 믿으면서 어떤 이유에선지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나는 분노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무엇에 분노했었나 친구여' 하고 묻는다. 그 감정은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영역이고, 그가 말해주지 않는 한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또한 A가 좇는 비비드라라러브를 이미 도둑맞은 상자로 비유하며, 아무리 애써도 찾아낼 수 없고, 상자 대신에 허무와 실망이 놓여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진실로 사랑했던 내 친구여 왜 이리 좋았던 날에 슬퍼했었나
슬퍼했었나 슬퍼했었나 슬퍼했었나"
→ '사랑했던'이라고 함은, 현재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점이나 가치관이 달라 절연되어 버린 것일까? 그렇다는 것은 나는 이미 나이를 먹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상황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좋은 날에도 슬퍼했던 A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A와 나의 대립 정도가 기쁨과 슬픔의 양극으로 표현될 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좋은 날에 A는 '어째서' 슬퍼했을까?" 하고 그의 슬픔의 원인을 궁금해하는 감정도 섞여 있다고 보였다.
[후렴]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빛나는 눈으로 너는 말했지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기필코 있다 있다 있다 있다 했던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 "Where's the lala love Vivid lala love" 이 가사는 화자인 내가 A에게 던지는 물음일 수도, 혹은 A의 입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는 비비드라라러브가 어디에 있는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빛나는 눈으로 말하고 있다. 게다가 기필코 있다고 말하며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 굉장한 믿음이다. 그래서 확신에 찬 A의 모습 때문에 화자인 나의 내면에서 약진 같은 게 일고 있는 건 아닐까. '대체 비비드라라러브가 무엇이관데 이토록 강한 신념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이것은 A가 나에게 비비드라라러브를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단지 그의 일관된 행동이 나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렇게 출렁이기도 한다.
[2절]
"무엇에 좌절했었나 친구여 세상이 변할 거라고 했었지
유감스럽게도 나의 친구여 상한 포도알이 다시 신선해지나"
→ 1절과 마찬가지로 A는 비비드라라러브를 찾으며 좌절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그가 무엇에 좌절했는지 알지 못한다. 좌절 또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찾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비비드라라러브가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만드는 존재'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비비드라라러브는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사랑이 아닌 넓은 범위에서의 사랑, 즉 세상에서의 때 묻지 않고 열정적인 사랑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랑의 부류는 연애 감정을 넘어서 헌신이나 친절까지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태도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이미 세상은 깊은 암흑에 잠식되어 있어. 태초에 순수한 사랑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미 변하기 시작했다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며 세상을 상한 포도알에 비유한다. 화자는 은유를 참 잘 쓴다. 문학학도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여 귀가 닳도록 들었던 빛나는 세상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나"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한마디에서 내내 드러내지 않았던 나의 마음이 무심코 노출되었다. 나 또한 A와 마찬가지로 그런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 때문에 비비드라라러브가 허상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전제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다고 백퍼센트 믿고 있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테니까. 반면 믿음이 확고한 A에게서는 “혹시나 비비드라라러브가 없는 건 아니야?” 하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확장해 보자면, A와 나는 한때 비비드라라러브를 같이 좇았던 관계이고, 나는 이상과 가까워짐을 느끼지 못한 채 현실로 되돌아갔으나, 반면에 A는 지금도 그것을 찾아내려 애쓰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A의 심정을 공감하기에 안타까워하면서도, "혹시 내가 포기했던 비비드라라러브를 A가 지금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과 궁금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인 것은 아닐까.
게다가 2절의 마지막 구절에서 "어디에 있나"가 네 번이나 반복된다. 곡의 의도를 깊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파트에, 비비드라라러브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만약 A가 이미 빛나는 세상을 발견했다면 그건 어디에 있을까?" 하는 나의 심리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화자인 나는 겉으로는 현실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려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때 그와 같이 추구했던 비비드라라러브의 잔향을 품고 있는 인물이 아닐지 생각한다.
※ 이 뒤로는 후렴의 반복이므로 생략
화자의 말처럼 세상은 상한 포도알처럼 다시는 신선해질 수 없다는 냉소로 가득 차 있다. 이미 변질된 세계가 본래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 눈부신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희망 역시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두 감정 사이, 즉 냉소와 희망, 체념과 기대의 간극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분명히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그 모호한 진동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절망하고, 또 때로는 여전히 빛나는 무언가를 믿으려 한다. 결국 '비비드라라러브'는 실재 여부를 가늠하려는 탐색이자, 각자가 견뎌내는 흔들림 자체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