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구의 데뷔를 어떻게 결정해 왔는가' 하는 문제
지난 8월 19일, 사이버수사대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CJ E&M 사무실과 문자투표 데이터 보관업체를 상대로 한 압수수색에서 수상한 녹음파일을 발견했다. 녹음 파일에는 <프로듀스 X 101>의 최종 투표에 대한 조작이 언급되어 있었다.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시즌뿐 아니라 지난 시즌에 대한 조작 역시 언급되었다고 한다. 21에는 동일한 방송사의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아이돌 학교>에 대한 조작 정황도 확보되었다. 그리고 9월 2일에는 모든 시즌을 대상으로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으며, 지난 5일에는 모든 시즌의 유료 문자 투표 결과를 조작해, 특정 연습생에게 부당하게 이익을 준 혐의로 안준영 PD와 김용범 CP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심지어는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의 경영진 등 여러 기획사의 관계자들이 방송 주요 제작진들에게 고가의 성 접대를 제공한 정황과 증거까지 포착되었다. 그동안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처음부터 우승자를 정해놓고 방송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은 종종 있어왔지만, 그것이 실제로 드러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린 연습생들과 '국민 프로듀서'들에게 공정한 데뷔 절차와 많은 결정권을 약속한 것처럼 보였던 <프로듀스> 시리즈의 민낱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속도로 드러나고 있다.
투표 조작에 대한 법적 처벌과, 방송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여죄는 경찰이 수사하고 처벌할 일이다. 그렇지만 투표 조작의 여부를 떠나 '투표를 기반으로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정말로 공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볼거리가 많이 남아있다. <프로듀스> 시리즈와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의 투표 조작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정성을 해하고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그동안 아이돌 시장과 팬덤에 있던 병폐들을, 오직 수익을 얻기 위해 매스 미디어를 통하여 부추긴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가수 메이다니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오디션 프로그램들에 대해 "한 명의 스타를 키워내기 위해 너무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해야 한다.", "너무 어린 친구들이 그들의 칭찬에 좋아서 날뛰다가 한 순간에 탈락돼서 떨어지고, 이유 모를 이유로 누군가는 스타(덤)에 올라가 있고."라며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비판을 한 바 있다. <프로듀스 X 101>의 경쟁에는 100명 이상의 연습생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방송 제작진은 이들의 경연뿐 아니라 연습 과정, 인터뷰, 연습 외의 생활 등 다양한 모습을 비췄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이나 매력을 카메라에 내비칠 수 있는 멤버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누구를, 그리고 어떤 에피소드를 방송에 내보낼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순전히 방송 제작진에게 달려 있다. <복면가왕>과 같이 출연자의 아이덴티티가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이상, 출연자의 실력이나 매력뿐 아니라 다른 요인들이 투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알 수 없는 기준에 의해 편집된 분량의 차이는, 누군가를 '국민 프로듀서'들의 시야 안으로 내비치거나 누군가를 시야 밖으로 감춘다.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이들은 사람들의 가치판단 영역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이 되어 버린다. 더구나 그런 결과가 처음부터 미리 정해져 있던 것이라면, 탈락한 참가자들은 그저 방송의 흥행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당근을 좇다 추락하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방송사와 제작진이 데뷔를 약속한 (사실상 데뷔를 저당 잡은) 시나리오를 수행한 멤버들은 졸지에 '공범'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당시 해당 연습생들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연습생 혹은 아이돌을 그만두기 위해서 막대한 금액의 투자비용을 회사에게 갚아야 한다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유혹에 대한 거절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옵션이나 다름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기획사와 방송사는 현재 이름이 오르내리는 팀의 멤버들을 보호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의 자신들의 이름을 이미 유명세를 얻은 팀 멤버들의 뒤로 감췄다. 해당 팀들에는 청소년 멤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져야 할 어른들은 그들을 앞세우며 자신들의 잘못과 존재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더구나 '국민 프로듀서'라는 전 출연자 투표 시스템은 팬들이 특정 연습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 그대로 환상을 팔았다. 그래서 <프로듀스> 시리즈 참가 연습생들의 팬덤은 자신의 시간과 경제력을 들여 투표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등, 이미 데뷔를 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팀의 팬덤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방송사와 기획사가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기획과 홍보에 대한 비용을, 연습생들을 인질로 잡아 팬덤에게 요구한 것이나 진배없다. 처음부터 <프로듀스> 시리즈는 연습생과 팬덤에게 '공정한 데뷔'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기획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시나리오를 미리 내정해두었고, 방송사는 편집과 투표 조작을 통해 모든 과정을 입맛대로 조정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연습생과 팬덤에게 달콤한 약속을 했지만, 그 안에는 사실 지금까지 아이돌 시장이 가지고 왔던 병폐들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농축되어 있었다. 팬덤이 팬덤의 권리를, 그리고 연습생들의 권리를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 높여 요구하는 이때에 가장 거대한 아이돌 상품이자 프로젝트였던 <프로듀스> 시리즈는 흐름을 역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시리즈는 아이돌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성을 제시하기보다는 병폐를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누가 누구의 데뷔를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 우리는 아직 그 답을 내리기 어렵다. 데뷔 과정에서 일반 대중의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기존의 데뷔 방식 역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습생에게 '투자 비용 회수'라는 짐을 지워 경제적으로 착취하거나, 사내에서 검은돈이 오가는 오랜 병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행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제도나 행정 인력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의 극단에 또 다른 문제가 있는 이 모순적인 구조를 개혁할 뾰족한 수는 적어도 지금 당장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조작 여부에 대한 팬덤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지금의 <프로듀스> 사태에 대한 보도와 조사를 이끌어냈다. 어느 누군가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탈(脫) K-POP'을, 어느 누군가는 끊임없는 비판과 윤리적 소비를 주장한다. 그리고 연습생들은, 이제는 '데뷔'를 저당 잡힌 인질이 아닌 이 업계에서 당연한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과정에서 겪은 부조리를 증언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연습생들이 생산 구조를 개혁해내기란 매우 어렵지만, 적어도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분위기와 여론은 만들어진 셈이다. 어떤 방식이나 형태로든, 기획사와 방송사라는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전통적인 의사 결정권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미약하지만 확실하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목소리들의 요구로 드러난 <프로듀스> 시리즈의 민낱은 하나의 거대한 실패로 남아서는 안된다. 일련의 사건들과 그 전모들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방송사 전체에게 있어 생생한 경고로서 남아야 한다. 기획사와 방송사라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대한 두 축이 이제는 스스로 바뀌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왔다는 경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