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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질문하기: 왜 동성애가 죄인지 묻는가?

by 이상윤

(기독교인 시각에서 동성애, 동성혼 등에 대한 단상을 쓴 글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용례와 뜻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감안해주세요.)


예전엔, 동성는 기독교적 죄지만 그래도 교회가 사회적 동성을 반대해선 안되며 오히려 이를 지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이 잘 드러난 글이 아래 2016년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이다.



하지만 글을 쓴 시점부터 줄곧 과연 '동성가 죄냐'는 질문에 '죄'라고 답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성경책 글귀만 보면 동성애가 '죄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긴 (심정적으로) 어렵지만… 그래도 한 인간 정체성을 '죄'라 말하는 건, 아무리 종교적 의미라도, 분명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후 고민을 거듭하면서, 최근 진짜 문제는 '죄냐 아니냐'에 대한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에 있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 묻는 것은, 처음부터 동성애자들을 '나와 다른 존재들'로 전제하고 묻는 것으로,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나와 다른 '타자'로 묶어 이들의 정체성을 평가하려 드는 질문은, 그 프레임부터가 의도가 담긴 폭력이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생각해보자. 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 배우가 있다. 그가 평소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던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서 대뜸, '개고기를 먹는 당신들은 야만적인가 아닌가' 질문한다. 한국인인 당신은 여기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아니, 답을 하긴 할 것인가?


물론 이는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사례지만, 지극히 폭력적인 의도로 설계된 프레이밍이란 차원에서, 이 예시는 교회들의 동성애에 대한 질문 사례와 거의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질문에 대한 질문을 잊으면, 결국 이렇게 부끄러움과 후회만 남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글을 쓰게 된다. 비록 이전 글이 '진보적 매체'라는 뉴스앤조이에 실리긴 했지만,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개신교 목사들의 경직되고 폭력적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며 '보수적'이었던 과거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요즘 한국에선 '전광훈'류의 선동까지는 가야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 같지만, 당연하게도 제가 이 글에서 쓰고 있는 '보수적'이라는 표현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전자는 나쁜 선동에 불과하며 후자의 '보수'가 더 상식적인 용례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동성혼을 반대해야만 하는가

종교 규범이 꼭 사회제도와 일치할 필요는 없어…'어떤' 목소리를 내느냐가 더 중요해


이상윤 | 2016.05.20 09:48


현재 우리나라 동성혼 논의에서 제일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은 기독교계다. 작년 여름 동성혼 소송이 진행 중인 서부지방법원에 서명자 수만 15만 명이 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이번 선거에서는 동성애 법제화 반대를 전면에 내세우며 원내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나 역시 개신교 신자로서 이들의 주장에 큰 틀에서는 공감한다. 성경의 문언에 따르면 동성애 역시 우상숭배나 혼외정사 등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반드시 동성혼 제도화를 반대해야만 하는지는 의문이다. 동성애 금지라는 종교 규범과 동성혼이라는 사회제도의 문제는 다르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논의 대상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흔히 혼동하는 부분 중 하나가 성 행동(sexual behavior)과 성 지향(sexual orientation)이다. 성 행동은 성관계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성 지향은 이성‧동성에 지속적으로 느끼는 애정적‧성적 끌림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둘 사이에 필연적 관련성은 없다. 동성과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꼭 동성 지향이 있는 것은 아니며 동성과 성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꼭 동성 지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동성혼은 어디까지나 성 지향에 관한 논의를 말한다. 즉, 쉽게 말해서 동성혼 논의는 '선‧후천적으로 동성 지향을 갖게 된 사람들을 제도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논의'이지 '동성 간 성행위를 조장하고 합법화시키는 것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끔씩 전자와 후자를 구분하지 않고 자극적 묘사로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의를 요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이 법적인 혼인 관계를 인정받지 못해 겪는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의료 접견권 배제, 재산 분할 청구권, 상속권 불인정, 국민 건강 보험법, 근로기준법, 국민연금법 등 사회보장 법제상의 권리 불인정 등등. 법이 부부에게 권리‧의무를 부여하는 모든 경우에 차별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제도적 차별이 주는 비인간적 모멸감이다.


지난 2013년 10월, 40년 이상 동거해 온 한 여성이 다른 일방의 질병으로 사망하는 과정에서 유족들과 갈등을 겪다가 끝내 인간적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만약 동성혼이ㅤ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전통적인 결혼관을 흔드는 등 사회에 큰 해악을 초래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감내해야 할 고통으로 볼 여지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주지하다시피 에이즈의 주된 원인은 이성 간의 문란한 성행위에 있고, 네덜란드의 경우 동성혼이 시행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전체 혼인 중 동성혼이 차지하는 비율은 1.94%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과연 교회가 제도적 차별에는 침묵하고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목소리만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독교계가 내세우는 주된 이유인 성경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계는 성경이 동성애를 죄악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동성혼 제도화는 반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동성혼까지 반성경적인 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개의 종교 규범이 언제나 사회제도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경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지만,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우리 헌법 제20조 제1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성경이 혼외정사를 죄악으로 보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미혼모 가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책적 지원을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개개의 종교 규범에는 반하지만 성경의 전체의 관점에서는 매우 성경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비기독교인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미혼모의 입장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자유로운 포교 활동을 보장한 우리 헌법과 생계 곤란한 미혼모 가정을 도와주는 정책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성혼 논의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처럼 이성애자가 아니라 선‧후천적 원인으로 동성애 지향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는 가정부터 접근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양극화나 난민 문제 등 세상의 논리로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교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다. 성경 전체의 정신을 생각지 않고 개개의 규범에만 집착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말씀의 본질에 부합하지 않는 반성경적인 일에 일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의 정신을 생각했을 때 과연 동성애자들을 죄인 취급하고 동성혼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성경적 정의라고 속단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들에게 최대의 제도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성경적 정의에 더 부합할까? 성경은 동성애자들은 죄인이고 이성애자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지만 다만 은혜로 구원받는 것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에 한 번 더 숙고해 보는 성숙한 자세를 권면하고 싶다.


(출처: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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