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연합(European Union) 경쟁법·정책에 관한 담론 중 가장 두드러지는 토픽 두 개만 꼽는다면 단연 디지털 플랫폼과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이슈는 모두 기존 경쟁법의 접근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이슈는 플랫폼과 달리 국내에서는 관심도 적고 소개도 잘 안되고 있어서 안타깝다. 물론 경쟁법 연구자의 관점에서는 디지털 플랫폼 이슈가 경쟁 정책과의 관련성도 높고 파급력도 커서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지속가능성 이슈는 다른 문제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심각성과 중요성을 갖는 문제로 (화성이 아닌) 지구에 터를 잡고 사는 한 누구든 결국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주제다. 따라서 국내 경쟁법 연구자들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경쟁법의 역할은 없는지' 혹은 '경쟁법이 지속가능성 정책들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꼭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그동안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은 플랫폼 정책 연구에 쏟느라 지속가능성 이슈에 대해서는거의 관심을 쏟지 못했는데, 최근 집행위원회의 이니셔티브(initiative)가 나온 것을 계기 삼아서 지금껏 미뤄두고 또 미뤄 온 메모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단계라 내용상 오류나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부족한 부분은 점점 보완해가기로 다짐하면서 용기를 내본다.
1.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공개 자문(public consultation) 절차 개시
집행위원회의 이니셔티브란 지난 10월 13일 개시된 경쟁법과 지속가능성 정책들의 관계에 관한 공개 자문 절차(public consultation)를 말한다. 이는 지난 9월 22일,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Margrethe Vestager) 부위원장이 연설에서 밝힌 계획에 따른 것으로, 당시 베스타게르 부위원장은 현재 유럽연합이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55%까지 감축하고, 2050년까지는 탄소 중립을 목표로 제시한 상황에서 경쟁법 역시 이러한 그린 딜(Green Deal) 정책의 일부로서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경쟁법 규정들과 지속가능성 정책들이 어떻게 함께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공개 자문 절차를 11월 중순까지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10월 13일 집행위원회는 자문 절차 개시와 함께 의견 요청서(call for contributions)를 공개하였는데 여기서 집행위는 경쟁법이 주된 환경 정책 수단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지만 보완적 역할은 할 수 있다고 보면서, 앞으로 국가 보조(state aid) 규정(Art.107 TFEU), 공동행위 및 단독행위 규정들(Arts.101, 102, TFEU), 기업결합 규정들(Reg. 139/2004)을 중심으로 개선점은 없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고 밝히고 있다.
제안서에서 설명하고 있는 각각의 주안점에 대해서 요약해보면, 국가 보조의 경우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지닌 국가 보조를 어떻게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지(예컨대 브로드밴드, 철도 투자가 종 다양성을 위협하는 경우 종 다양성을 적절히 보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수력 발전이 물고기 개체수를 감소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어떻게 이를 보호하도록 할 수 있는지 등)' 또는 '친환경적인 국가 보조의 경우 어떤 기준에서 친환경성("green bonus")를 평가하고 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적극적으로 승인해줄 수 있을지' 여부 등이 관건이다. 그리고 단독행위(abuse)·공동행위(agreements)의 경우 '지속가능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사업자들 간의 협력 행위가 경쟁법 위반 리스크로 제한을 받는 실제적, 이론적 예시들은 무엇이 있는지, 경쟁을 제한하지 않는 지속가능성 협력행위의 특징들은 무엇이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지(정책 가이드라인, 사례별 평가, 집행 순위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등), 경쟁제한적 협력행위지만 친환경 목표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정당화될만한 경우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친환경 목표가 그런 특별 대우에 부함하다고 볼 것이며 또 친환경 목표들은 다른 사회 정책 목표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등이 핵심이다. 마지막 기업결합의 경우는 '문제된 기업결합이 친환경적 제품 또는 기술들에 관한 소비자들의 선택지를 감소시키는 경우가 있는지' 또는 '현재 기업결합 집행이 그린딜의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성 목표들에 더 잘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이 주된 논점이다.
2. 네덜란드 경쟁 당국의 지속가능성 협력 행위에 관한 가이드라인
집행위 제안서를 보면 논점들이 생각보다 상당히 구체적인데 이는 주요 회원국들에서 이미 관련 논의를 깊이 있게 진행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최근 네덜라드 경쟁당국(Authority for Consumers and Markets)은 지속가능성 협력 행위에 대한 가이드라인(안)을 발표하면서 유럽 안팎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었고(2020년 7월 9일),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네덜란드 당국의 움직임에 입장 표명을 하면서 지지 의사를 밝히기도 했었다. 네덜란드 가이드라인의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내용만 짧게 소개하자면, 해당 가이드라인은 특히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는 협력 행위 등 지속가능성 목표의 협력행위가 현재 경쟁법 프레임워크(Art.101(3), TFEU)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법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소비자 이익에 대한 부정적 효과(가격 상승 등)와 사회 전체의 이익(친환경 효과 등)을 교량하여 후자가 더 크다고 판단될 경우 공동행위 금지 규정의 적용을 제외하는 기준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적용 제외를 신청하는 사업자들은 그러한 비교를 반드시 세세한 정량 분석(full quantitative analysis)으로 수행할 필요는 없으며 합의의 이점과 불이익을 설명(outline)하는 정도면 충분하지만,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덜 경쟁 제한적인 대안이 없을 것을 증명해야 한다. 네덜란드 가이드라인에 관한 기사는 이곳과 이곳에서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3. 그리스와 독일 경쟁 당국의 지속가능성과 경쟁법 관련 보고서
당연하게도 네덜란드 가이드라인만이 집행위원회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대개 그렇듯 집행위원회는 여러 회원국들의 움직임이 있은 뒤에야 구체적인 정책 이니셔티브를 개시한다. 지속가능성 이슈의 경우 이런 유럽 차원의 움직임을 끌어 낸 대표적 회원국들로는 네덜란드 외에 그리스와 독일 경쟁당국을 언급할 수가 있다.
그리스 경쟁당국(Επιτροπή Ανταγωνισμού)의 경우 세계적 경쟁법학자인 Ioannis Lianos 교수가 수장이 된 이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말 괄목할만한 변화와 발전을 보이고 있는데, 지속가능성 분야에서는 보고서 발표와 컨퍼런스 개최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 경쟁당국의 보고서는 네덜란드 가이드라인과 달리 협력적 행위 외에 단독행위(abuse of dominance)와 기업결합의 경우에도 분석하면서 '반경쟁적 행위가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소비자 이익이나 효율적 개선으로 정당화될 여지는 없는지' 그리고 '기업결합 심사 프레임워크에서 친환경적 인센티브를 어떻게 고려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추가적인 설명은 이곳의 메모 참고할 수 있고, 컨퍼런스 동영상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일 경쟁당국(Bundeskartellamt)은 워낙 유명한 경쟁당국이고 지속가능성 분야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초 독일 경쟁당국 역시 지속가능성과 경쟁법 관련하여 워크숍을 개최하였으며 관련 보고서를 공개하였는데 보고서 제목은 '오픈 마켓과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 - 경쟁법 집행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공익적 정책 목표들(Offene Märkte und nachhaltiges Wirtschaften – Gemeinwohlziele als Herausforderung für die Kartellrechtspraxis)'이다.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한 포스트에 따르면 네덜란드나 그리스보다는 지속가능성 협력행위와 같은 자발적 규제 행위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즉, 근본적으로는 환경법이나 다른 입법적 해결이 원칙이라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기업결합의 경우 최근 독일에서는 '지속가능성' 고려를 근거로 경쟁당국이 불허했던 기업결합이 경제부 장관의 승인으로 번복된 사례(Miba/Zollern)가 있는데 이 사건이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어떤 식으로 반영되었을지 궁금하다.
4. 프랑스 경쟁당국의 집행 사례
최근 지속가능성 논의에서 프랑스 경쟁당국(Autorité de la concurrence)에 관한 소식은 눈에 잘 띄지 않는데, 그동안 프랑스가 Isabella de Silva 체제 하에서 강력한 집행으로 많은 부문에서 주목을 받아왔던 점을 고려하면 이런 잠잠함은 상당히 의외로 느껴진다. 물론 단지 흥행이 안되는 것일 뿐(보고서나 가이드라인이 아니라서 그런가?) 프랑스 경쟁당국이 지속가능성 고려에 대해 소극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 프랑스 경쟁당국은 올해 초 집행 우선순위를 발표하면서 주요 과제 중 하나로 경쟁법 집행시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보도자료는 지속가능성 고려의 예시로 2017년 바닥 마감재(floor coverings) 카르텔 사건을 언급했는데, 이 사건은 바닥 마감재 분야에서 관련 업체들이 상품의 친환경 효과에 대한 광고는 하지 않기로(제한된 방식으로만 하기로) 합의한 행위(2002-2011) 등이 문제된 사건으로, 프랑스 경쟁 당국은 그러한 행위가 사업자들의 친환경 품질 혁신 유인을 감소키고 제품 차별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위법성 요소로 고려했었다(Decision 17-D-20).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지속가능성 고려에 기초한 새로운 경쟁 저해 이론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례로 굉장히 흥미롭게 보고 있는데(다만 이 사건에서 다른 문제되었던 행위들의 위법성이 너무 명백하여 지속가능성의 역할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이 사건과 올해 초 발표 이후 아직까지 내 리서치 결과에서는 프랑스 경쟁당국의 이렇다 할 정책 페이퍼나 움직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찾아봐야할 것 같다.
5. 리투아니아 경쟁당국의 신중론
당연하게도 유럽이라고 지속가능성 이슈에 대해 모두 찬성하는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중론이 더 주류적 시각이라고 볼 여지도 없지 않은데 앞서 언급한 그리스 컨퍼런스에서 리투아니아 경쟁당국 수장인 Šarūnas Keserauskas가 제기한 포인트들은 우리가 경쟁법과 지속가능성 목표의 관계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주의해야할 부분들을 잘 환기시켜준다. 그에 따르면, 경쟁법은 지속가능한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사회적 가치들을 다루는 데 최적화된 툴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경쟁법 분석에 포함된다면 경쟁법 집행의 효과가 반감될 수 있고 법적 투명성과 확실성을 잃게 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분석은 경쟁당국의 임무에 포섭시키는 대신 지속가능성을 전담하는 규제 기구에 맡기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접근이라고 강조하는데,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설이지만, 네덜란드의 경우 조합주의 전통에서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협력으로 많은 일들을 해결해왔기 때문에 지속가능성 이슈가 더욱 부각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생각이 맞다면 과연 네덜란드 식 접근을 다른 나라들이 어느 수준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해보인다.
지금까지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쟁법과 지속가능성의 관계에 관한 논의 현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보는 시각에 따라 선호는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유럽연합의 그린 딜(Green Deal)에 영향을 받아 그린 뉴딜을 정책 목표로 제시하고 있으며 또 유럽연합과 같은 탄소 중립 목표를 벤치 마킹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37%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쟁법(공정거래법)의 역할이 현재로서 충분한지에 대한 '논의' 자체는 우리도 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잠잠한 편이지만 앞으로 지속가능성 이슈가 우리나라나 일본 등 동아시아 법제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