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랩에서는 (물론 랩 따라 다르겠지만) 연말이 되면 교수님과 연구실원들이 모여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기억하기로는 "annual performance evaluation"이라고 했던 것 같다. 실제 참석해본 적은 없고 들은 것뿐이지만, 주로 연구실의 연구실적을 중심으로 뭘 했고, 뭘 느꼈고, 뭘 어떻게 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연말 느낌도 나누고, 긍정적 에너지도 얻고, 또 그 힘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그러는 듯. 그리고 저녁엔 와인, 그리고 게살 로제 파스타... 크... 연구비 탄탄한 이공계 대학원에는 아직 풍요와 낭만이 살아있구나-하고 느꼈다. 우리는 이공계와 사정이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나마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한 해를 마무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살림도 모두 부족한 형편이지만, 우리 연구실도 돌이켜보면 나름 보람 있고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시의 적절하게 플랫폼 세미나도 몇 번 열고, 연구 모임도 여러 번 갖고, 일부지만 홈페이지도 새단장 하고('드디어 내가 웹페이지 편집을 해냈다'는 자랑)... 코로나로 힘든 와중에도 그래도 꽤 많은 일들을 해낸 것 같다. 무엇보다 좋은 소식은 이번 12월, ICR 센터 이름으로 총 4편의 논문이 발표된다는 것! 아무리 법학 논문이 다른 학문으로부터 'science도 없이 썰만 푸는 게 무슨 논문이냐'면서 조롱을 받는다지만 여기서도 논문 투고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전문가들이 심사의 칼자루를 들고 있는 peer review 저널은 더더욱. 하반기에만 교수님 논문 빼고서도 연구실 이름으로 4편의 peer review 논문이 나온다는 것은 같은 연구실 실원으로서 정말 기쁜 일이다.
1. 류시원, "영국의 시장조사제도에 관한 연구 - 공정거래법과 전기통신사업법에 대한 시사점을 포함하여" 경쟁법연구 제42권(2020. 11) 원문 링크
2. 강우경, "대규모유통업법상 '거래상 우월적 지위' - 대형 가전제품 유통시장을 실례로 하여" 유통법연구 제7권 제2호(2020. 12) 원문 링크
3. 박경미, "디지털 플랫폼 투명화·공정화 법제의 동향과 전망: EU, 일본, 우리나라 법제의 주요 내용과 평가에 대한 비교법적 검토" 고려법학 제99호(2020. 12) 원문 링크
4. 이상윤·류시원, "프랑스 구글(언론사 저작인접권) 사건의 의의와 디지털 시대 경쟁법의 역할에 대한 시사점: This is not a competition law case" 법학논집 제25권 제2호(2020. 12) 원문 링크
요즘 센터를 지키고 있다보니 나는 운 좋게도 다른 분들의 논문을 출간 전에 읽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교수님 초고 외에) 다른 분들의 초고를 읽고 코멘트를 드리는 일은 사실 나도 처음 해본 작업이었는데 품은 좀 들어가도 나름대로 재미있고 좋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논문이 발전되는 과정 속에서 그의 생각이 어떻게 진화해가고 점점 더 논리를 갖춰가게 되는지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논문은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관찰을 통하여 발표된 논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논문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도 대화의 일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다른 연구실원들과 반복되는 공동작업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물론 '독자'로서 다른 분들의 글에 코멘트를 드릴 때와 달리, '저자'로서 내 글에 대한 다른 분들의 코멘트를 반영할 시간이 되었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아래에는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세 저자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아주 약간씩만 논문에 대한 소개의 코멘트를 달아보았는데, 꼭 링크된 원문을 클릭해주셨으면 좋겠다. 편집부 사정으로 아직 원문 링크가 나오지 않은 곳은 1-2일 내로 보충할 예정이다.
1. 류시원, "영국의 시장조사제도에 관한 연구 - 공정거래법과 전기통신사업법에 대한 시사점을 포함하여" 경쟁법연구 제42권(2020. 11) 원문 링크
영국의 Market Investigation ("MI") 제도의 내용과 의의, 시사점을 분석한 논문이다. 영국 MI는 그동안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다가 올해 EU 집행위원회가 New Competition Tool의 도입을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 제도인데, 현재 Digital Markets Act의 핵심 집행 수단으로도 (비록 영국 MI에 비해 상당히 축소된 형태가 되었지만 어쨌든) 도입이 예고되고 있을 만큼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먼 나라 영국과 유럽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플랫폼 규제 차원에서 전기통신사업법 제34조의 경쟁상황평가 제도 적용 대상을 부가통신사업자(온라인 플랫폼)로 확장 적용할 수 있는지가 논의된 적 있었는데 관련 맥락에서 영국식 MI가 참고된 적이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의 논의는 결국 실태조사라는 완화된 형태로 귀결되기는 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알 듯 규제 당국은 한번 알게 된 규제 아이디어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에 영국식 MI 제도의 명과 암을 알아두는 일은 앞으로도 꼭 필요하다. 내가 알기로 영국 MI에 관해서는 류 변호사님 논문이 거의 최초의 논문으로, 시장과 경쟁 정책에 관심 있는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2. 강우경, "대규모유통업법상 '거래상 우월적 지위' - 대형 가전제품 유통시장을 실례로 하여" 유통법연구 제7권 제2호(2020. 12) 원문 링크
강우경 변호사님 논문은 대규모유통업법상 행위자 요건으로서 거래상 우월적 지위(cf. 제2조 제1호, 제3조 제1항)의 타당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동안 나는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를 연구 주제로 한다고 말하면서도, 부끄럽게도, 정작 대규모유통업법 등 우리나라의 관련 법의 현황과 적용 상 문제점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었는데ㅠ 강 변호사님 논문을 통하여 이번 기회에 몰랐던 내용도 많이 알게 되고 또 관련 법 체계를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내가 이해하기로 이 논문이 던지고 있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현재 대규모유통업자들은 과거 전통적 오프라인 유통시장에서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인한 엄격한 규제 상황에 놓이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상황이 현재에도 타당하느냐는 것이다. 과연 유통 시장의 온라인 전환을 배경으로 유통업자들의 시장 지위가 크게 변화된 상황에서도 특히 대형 가전제품 시장에서 대규모 유통 사업자와 독과점적 납품업체의 관계에서까지 대규모 유통업자들의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사실상 추정하는 현재와 같은 접근이 타당한 것일까? 논문은 관련 규제에 대한 비교법적, 경제학적 검토와 함께 구체적인 실증 자료 분석을 통하여 '그렇지 않다'는 점을 논증하고, 대규모유통업법상의 행위자 요건으로서 거래상 지위의 판단 기준은 현재 수준보다 훨씬 더 정치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방법으로 깊이 있는 분석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시각에 상관없이 누구든 적지 않은 인사이트와 생각 거리를 얻을 수 있다.
3. 박경미, "디지털 플랫폼 투명화·공정화 법제의 동향과 전망: EU, 일본, 우리나라 법제의 주요 내용과 평가에 대한 비교법적 검토" 고려법학 제99호(2020. 12) 원문 링크
마지막은 요즘 가장 핫한 디지털 플랫폼 규제법제를 다루고 있는 박경미 차장님의 논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EU와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법제를 (i) 도입 배경과 목적, (ii) 검색 중립성과의 연결성, (iii) 규제 형식 및 적용 범위, (iv) 집행 프레임워크 (v) 규제 효과 모니터링 등 다섯 가지 측면에서 비교 분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의 다른 내용들도 정말 좋았지만 특히 그동안 관심을 두고 있던 일본의 플랫폼 규제에 대해 비교 분석해 된 파트가 가장 유익하고 좋았다(일본어 초록도 感じ...). 일본은 우리나라에 있어 비교법적 분석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가장 큰 곳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결과인지 의도적 무시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관심과 연구 노력이 희박한 상황인데 이런 문제적 상황에서 이 논문은 특별한 가치를 갖는다. 나아가 이 글은 분석 대상을 동아시아에 그치지 않고 EU로 확장하여 독자에게 좀 더 넓은 시각에서 플랫폼 규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단연 이 논문이 갖는 가장 큰 기여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우리의 플랫폼 공정화 법안에 대한 생각은 회의적기만 했는데, 이 논문을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부분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또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시각에 대해 다시 한번 의문을 품고 고민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글을 어떻게 끝맺음을 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연말 답게 새해 다짐으로 끝맺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동안 대학원 삶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내가 여기서 공부를 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똑똑한 사람은 IQ가 높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판단에 탁월한 사람을 말한다. 물론 그동안 만난 모두가 다 그렇게까지 똑똑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대학원으로 시작되는 학문의 길에서 빛을 내는(= 인정 받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탁월한 사람들 '뿐'이라는 사실은 매우 자주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풀 펀딩을 받거나 어워드로 인정 받으면서 3-4개국어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과 달리 그저 연구를 '좋아하기만' 하는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나 하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런 곤혹스러움을 잠깐 잠깐이지만 잊게 만들어 준 것은 어디선가 들었던 '학문은 협업'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즉, 작은 연구팀 단위로 보든 커다란 학계 전체 단위로 보든, '학문적 성과'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협업한 결과'라는 말인데 이 말이 그렇게 힘이 되었다. 내가 남들처럼 100, 200을 기여하지 못해도 1, 2 정도만 기여할 수 있다면 (물론 거짓말로 기존 연구를 깎아 먹으면 안되겠지만) 충분히 여기 있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의미 부여 덕분에 힘들었던 지난 2020년도 제정신 잘 붙들고 보낸 것 같고 지금도 덕분에 잘 버티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정말 감사하다.
물론 이런 의미 부여가 dog-eat-dog 경쟁이 팽배한 한국 땅에서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난 2021년 상반기까지는 이런 의미 부여를 붙들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니까 2021년도 욕심 부리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여하며 살아야 겠다. 그러다보면 언젠간 내가 기여한 만큼 돈도 받고 인정도 받을 날이 올 꺼라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