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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논문, 두서 없는 생각들

by 이상윤


대학원을 들어가 연구를 하게 되면서 (나쁜 점도 많았지만) 좋았던 점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때 생각이란 단순히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회 (또는 자연) 현상에 대해서 이유와 맥락을 고민하고 다른 현상들에도 적용될만한 사고 체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보통 논문에서 '이론적 배경', '틀' 등으로 서술되는 부분들이다. 대학원에서 이렇게 이론들을 공부하면서 산발적인 사회 현상을 일정한 시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고 했던 과정들이, 내게는 세상에 감춰진 비밀, 법칙, 진리를 탐색하는 과정같이 느껴져서 참 재미있었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도 그런 탐구를 좋아했지만 성적도 안나오고 괜히 돈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는 것 같아 죄스러웠는데, 대학원이란 곳에선 그런 생각을 권장하고 또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연구가 점점 일이 되면서 느끼는 것은, 업로서의 연구에서는 '생각'의 비중이 애초에 그리 크지 않고, 그마저도 점점 적어진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주위의 많은 연구자들을 보아도,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은 한가로운 '생각'보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단편적인 자료들을 읽고 요약하는 데 할애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제는 논문이라는 것들도, 예전 대학원에서 접할 수 있었던 대가들의 아이디어와는 달리, '생각'의 흔적을 잘 찾기 어려운, 파편적인 지식 전달에 그치는 경우들을 더 많이 보게 된다(근데 이제 가끔씩 권위의 오남용과 개소리를 곁들인...). 아무래도 전 세계에서도 극소수에 속하는 대가들의 아이디어를 제외하면 '생각'은 돈이 안되고, 그보다는 당장 현장에 쓰일 지식을 생산하는 노동이 더 쓸모 있고 실용적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예컨대, 내가 작년에 썼던 가외성 시각으로 본 공정거래법 집행에서의 행정기관 간 권한 중첩공공선택론의 시각에서 본 한국의 기업결합정책 -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사례라는 글들이 있다. 마침 학위 논문이 끝난 뒤 시간 여유를 활용해서 나름 '생각'하려 애쓰며 힘을 쏟았던 글들이었다. 이론적 틀을 세우고 이를 통해 현상을 분석한 뒤 시사점을 도출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힘들었지만, 연구의 재미를 느끼며 과정을 즐겼고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피드백은 harsh했고, 관심도 받지 못했다. 지난 일이지만, 대개 (법학) 논문들이 그렇듯 주요 선진국 사례와 비교하고 관련 법리들을 모아서 이리 저리 끼워 맞춰본 뒤 외국 사례 및 기존 법리와의 정합성 측면에서 이 문제는 논리적으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렇게 썼더라면, 쓰기도 쉽고 반응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정반대의 예가 2020년도에 썼던 유럽연합 디지털 정책의 동향과 전망: “유럽의 디지털 미래” · “유럽 데이터 전략” · “인공지능 백서”의 주요 내용과 의의유럽연합의 플랫폼 규제 동향 - “Digital Services Act”와 “New Competition Tool”이라는 글들이다. 내용은 별 것 없고, 당시 유럽연합에서 벌어지고 있던 논의의 내용과 맥락 그리고 전망을 소개한 글들이었다. 여기서 내 '생각'이랄 것은 주요 사건들을 선별해서 정리한 것 외에는 딱히 없었다. 블로그 글이라면 모를까, 논문으로서는 별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당시 꽤 호응을 받았고, 이걸로 상도 받았고, 법 집행 실무를 보는 담당자들한테서도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 아마 '유럽에서의 규제 동향'이라는 최신 정보를 보고서처럼 활용하기 편한 형태로 전달한 게 유효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때를 떠올리면, 사회가 나 정도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이같은 단순 지식 노동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고는 한다.


연구는 어떻게 하고 논문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즘 많이 하는 고민 중 하나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늘 뭔가 '생각'을 하려 하고 '다른' 시각으로 현상을 설명하려 시도하는 게 맞는지, 보고서처럼 당장 쓸 수 있는 정보들을 가공하고 유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쉽게 쓰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학자로서의 연구와 논문은 어때야 하는가. 물론 내가 뛰어난 학자였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다 하면 되니까. 정말 경제학에서는 간단한 지식이나 코멘트를 블로그를 통해 발표하고, 심도 있는 연구 결과들은 따로 논문을 통해 발표하는 한편,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모아 다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중 서적으로 출판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왕성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 참 대단하고 부러운 분들이다. 하지만 난 그정도가 못된다. 그래서 고민이다.


지금이야 어찌 어찌 잘 헤쳐가고 살아가고 있지만… 앞으로는 강의도 늘어나고, 활동도 많아지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 만나면서 갖가지 번잡스러운 일들에 얽힐 것이다. 그러다보면 결국엔 나도 시간에 쫓겨 결국 '저질 논문'으로 요건을 채우는 데 급급하게 되겠지—그런 불안한 예감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학풍을 지닌 교토대까지 와서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연구자으로서의 시간을 좀 더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메일함에 조금씩 쌓여가는 제안들과 다가오는 강의 일정들을 보고 있으면, 언젠간 나도 시간에 쫓겨, (내가 믿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불안한 마음 반, 아쉬운 마음 반, 자기 전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두서 없이 써봤다. 뭐 어쨌든, 다 잘 되겠지.


그래도, Big thinker는 못되더라도, Big talker가 되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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