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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S ELECTRIC Jun 02. 2023

자칭 보드게임 덕후, 회사 보드게임 제작에 참여하기까지

“아빠, 보드게임 하자.”


일주일간 다른 지방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매주 금요일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에게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들이 작년까지 자주 꺼내던 말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아들 말의 음색과 톤이 계속 귀에 맴돈다. 몸과 마음은 피곤하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 지친 몸을 추스르고 거실 탁자 앞에 앉는다. “뭐 하고 싶은데? 하고 싶은 게임, 가져올래? 누나도 부르고~” 가끔은 게임 중에 보드게임판 앞에서 졸고 있는 아빠를 보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떤 지 궁금하다.


둘째가 4살 무렵 시작한 보드게임을 한 지도 7년 정도 된 것 같다. 처제가 둘째 생일에 사준 보드게임의 고전 ‘부루마불‘이 시작이었다. 2살 터울 누나와 달리 돈이 얼만지 잘 세지도 못하는 아들은 그래도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이동시키며 가족들과 어울려 노는 것 자체를 좋아하여 곧잘 게임에 임했다. 



부루마불을 하고 난 이후 우리 아이들은 달라졌다. 큰딸은 나라별 수도를 외우는데 흥미를 느껴 반에서 나라별 수도 맞추기 퀴즈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또한 두 아이 둘 다 자연스럽게 주사위로 이동한 나라에서 통행세를 주고받고 거스름돈을 받는 행위를 통해 셈에 대한 개념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었다. 게다가, 여러 나라를 구매할수록 확률적으로 수입이 많아진다는 일련의 투자 법칙도 자연스레 습득하였다.


난 이런 보드게임의 장점도 모른 채 초등학교 때 친구 덕에 시작했지만, 내가 어릴 적 처음 느꼈던 보드게임의 짜릿함과 즐거움을 우리 아이들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자녀들이 다 잘나가는 “사”자 붙은 직업을 가진 친척이 있다는 회사 모 매니저님이 말하기를, 그 친척분이 경제적으로 그다지 유력하지 못해 자녀들을 넉넉하게 키우진 못하셨으나, 남달리 어릴 적부터 자녀들에게 유일하게 열심을 내어 해준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보드게임이었다는 것이다. 보드게임, 그리고 그것을 어릴 적부터 즐겼던 자녀들의 직업적 성공과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 으나, 어쩌면 그 매니저님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아 그때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드게임 육아의 길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양산되는 보드게임 시장의 홍수 속에서 나만의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보드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가져보곤 했는데, 어떤 게임을 하든지 뭔가 2%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나는 내가 직접 보드게임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회사 홍보용 보드게임을 만들 예정이며 이를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임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현업으로 바쁘긴 하지만, 왠지 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으면 인생의 큰 기회를 놓칠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것저것 잘 버무려 쓴 지원서로 결국 참가자 6명 안에 들 수 있었다. 용산 타워에서 만난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끼와 열정이 충만한 직원들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명확했다. 엄마 아빠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잘 모르는 직원 자녀들이 부모님이 어떤 회사에 다니는지도 알아가면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표는 명확했으나 어떤 장르로 만들어야 할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여러 보드게임도 벤치마킹하려 하였으나, 주로 주사위를 던져 말을 옮기는 부루마불 식 게임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가 만들 게임 역시 주사위를 던지지 않고 할 수 있는 게임으로 컨셉 잡기는 쉽지 않았다. 주사위 게임으로 가되 단 경로를 조금 특이하게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우선 발전소까지 도착하자는 식으로 말이다. 전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태양광, 물, 파도, 바람, 원자력을 택하여 각각을 표현하는 말을 만들기로 했고 나중에 이 말들은 5가지 요정으로 나오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개인별 배정된 과제를 온라인으로 취합하면서 게임 구성과 내용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각 카드 안에 들어갈 문구는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표현들로 우리 회사 제품들을 반영하고 디자인에 관한 의견들도 나누었다. 


특히 내가 제안한 것 중, 파도의 요정인 “웨이브”의 헤어스타일을 아래로 처져 있던 앞머리를 위로 올리자고 한 제안이 최종 반영된 것이 별것 아닌데도 뿌듯했다. 



디자인이 나오고 게임 초도 샘플이 완성되었을 때 일렉크루(LS ELECTRIC 보드게임 일렉트릭 플래닛을 만든 프로젝트 참여자) 들은 두 번째 모임을 통해 직접 게임을 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 


초등학생 대상으로 만드는 보드게임이어서 어쩔 수 없이 주사위 게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만든 게임이라고 생각했기에 큰 기대는 없었는데 웬걸,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재미가 가득한 게임으로 둔갑해 있었다.


집에서 게임을 접한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도 제안했던 내용이 은근히 묻어 있는 게임에 흥미를 느끼며 좋아했다. 또 현직 교사를 포함한 몇몇 지인에게 전해주니 호기심을 가지고 구매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회사에서는1등 상금 100만 원이 걸린 보드게임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일렉트릭 플래닛’은 유명 보드게임 유튜브 채널에도 소개되기도 했는데 내가 참여하여 만든 게임으로 대회도 열리고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큰 보람이었다.


내 개인 블로그 첫 헤드라인은 “인생은 보드게임처럼”이다.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마치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사위를 던지거나 카드를 뽑는 행위를 통해 50%의 운명이 결정되고, 내가 어떻게 전략을 계획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50%가 좌지우지되는….


다른 사람의 차례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정해진 룰을 지켜가면서, 타인에게 해를 가하기도, 또 도움을 받기도 하는 Interaction(상호작용)의 치열함. 부자가 되기도 했다가 파산이 되기도 하는, 몇몇이 모인 조그마한 게임판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눈물겨운 노력과 치열함은 곧 인생과 많이 닮아 있다. 


온 가족 또는 친구들이 함께 모여 있어도 서로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요즘의 안타까운 세태 가운데, 블루 라이트 빛 보기를 잠시 멀리하고 가까이 있는 소중한 사람과 카드를 나누고 주사위를 던지며 서로 안부를 묻는 듯하다가 상대의 땅이나 돈을 가로채면서, 서로 손으로 눈빛으로 부딪혀 가는 인연을 보드게임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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