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여행으로의 초대.
해외 시스템 입찰은
다양한 제품과 과업을 포함하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복잡하여,
제안에 상당 시간이 소요된다.
설계, 납품, 설치 시운전을 포함하는 사업수행 기간도 최소 2년으로
사업에 관련된 분들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가끔 취미활동을 같이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태국 업체 한 분이 여행 준비로 고민이라고 하셨다.
“단체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사람이 잘 모이지 않아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며칠 뒤, 그분은 다시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외국인인데, 다른 분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날 저녁, 대답 대신 한 장의 사진을 받았다.
사진 속 여행지는 여느 때처럼 제안서 준비로 치열한 상황과 달리, 평화롭게만 보였다.
“숙소와 차량 포함이고, 가이드가 같이 다녀서 어렵지 않은 여행이 될 거예요.”
“우리가 갈 곳은 인도입니다. 레(Leh)라는 곳이요.”
#Day 01. 모험을 시작하다.
입찰이 끝나, 일주일간의 休 week가 승인되었다.
방콕 출장에서 돌아와 옷가지와 식량만 챙겨, 다음 날 뉴델리행.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우연히 태국인 승무원을 만나, 간단한 대화로 태국어를 연습했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의 여행에는 별걱정이 없었다.
뉴델리 공항에서 태국 업체 분과 그 분의 친구들 – 총 다섯 명의 태국인은
한국인 동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곧 작은 비행기에 올라탔고,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예상보다 높고, 추운 곳에 있었다.
고도 3,500m.
기온 4도. 델리와의 온도 차 25도.
도착한 날 저녁부터 샨티 스투파 (Shanti Stupa)를 시작해,
라다크 (Ladakh) 의 유적지와 달라이 라마의 사원과 수도원들을 찾아갔다.
하나 신기한 것은 어디를 가나 태국인 단체 여행객만 보이고 태국어만 들린다는 것이었다.
인도인 가이드는 태국어로 일정을 설명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보다 태국어를 훨씬 더 잘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같이 다니면서 일행들이 사진 찍는 것과 겨울 날씨를 좋아하고,
일부러 추운 곳을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국인들만 만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Day 03. 높은 곳을 넘어가다.
매일 일찍 일어나 대여섯 시간 차를 타고 이동한다.
밖을 내려다보면 깎아내린 절벽 밑에 터키석 빛깔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길은 자갈이 많고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하여
이리저리 몸이 흔들리고 손잡이를 놓고 있으면 차창에 세게 부딪힐 것 같았다.
그 와중에 고산병을 대비해 챙겨온 약병들이 모두 깨져버리고 말았다.
고도에 차차 적응했지만,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날은 심하게 멀미했다.
카르둥라 (Khardung La, 해발 5,359m)에 올랐을 때, 도저히 차에서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이드가 잠깐 산소호흡기를 대주었는데, 공기가 맛있다는 걸 난생 처음 깨달았다.
일행은 가지고 있는 약을 나누어 주고, 돌아가며 내 상태를 점검하였다.
약 기운 덕분인지 어지럽고 답답했던 증상이 금방 사라졌다.
#Day 05. 도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초모리리 (Tsomoriri) 호수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물가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가 수도관이 언다고 2인당 물 양동이 하나로
씻고 화장실 물 내리고 다 하라고 하니 힘든 밤이었다.
가지고 있는 옷을 꺼내 겹겹이 껴입고 누웠지만 새벽에 정전이 되어 전기 스토브가 꺼지고
동네 사람들이 숙소 앞에서 잔치하다가 큰 소리로 싸우기까지 해서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사진만 보고 어떤 곳인지 모르고 따라온 인도에서,
태국 사람들과 다니면서, 아파서 걱정을 끼치고,
고산병에, 추위에, 생고생이구나’, 생각하니 헛웃음이 터졌다.
또 저 멀리 만년설로 덮인 산들과 거대한 암벽 산들과
바다처럼 넓고 맑은 호수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의 상상 속 엄청난 자연을 보고 있는 걸까?
실제 여기에 있는 것이 맞나’, 꼬집어 보게 되었다.
#Brand-New Day. 새로운 여행을 꿈꾸다.
전기와 물, 공기의 소중함을 알게 된 여행.
낮은 고도에 있는 따뜻한 집과 일터로 돌아간다는 것이 어찌나 큰 기쁨인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를 기꺼이 받아주고 보살펴준 분들이 고마워,
목에 하얀 스카프를 걸어주는 숙소의 환송 행사와 일행의 작별 인사에 눈물이 날 뻔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한국에 마스크가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고,
함께 여행했던 태국 분들이 마스크를 보내주겠다고 연락해 왔다.
추운 곳과 모험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음에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위에서 먹고 자는 여행을 같이 가자고 한다.
“히말라야보다 상당히 추울 텐데, 꼭 가야 할까요?”
따뜻한 곳이 좋겠다고 했지만 사실, 어디에 간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