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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나딘 Nov 11. 2020

빛과 흙을 잇는 작가 김민선

작은 사물에 담은 예리한 시선

* 본 글은 [월간도예]Vol.296.(2020.11월)에 게재된 필자의 원고입니다.


온양 박물관이 주최하는 《제2회 공예열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김민선 작가는 도예가로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세라믹 스튜디오 <선과 선분>을 운영하는 그는 코스메틱 브랜드 SKⅡ 온라인 캠페인 영상 및 2016 FISITA World Automotive Congress 오프닝 영상, 2015년 제9회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특별전 오프닝 영상 등의 제작에 참여하며 영상 디자이너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과감한 선과 밝은 색채를 사용하며 기존 도자의 관념에 도전하는 그의 남다른 감각은 영상 디자이너로써의 미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김민선의 작품은 색과 형태에 의해 서구의 것을 추구하는 듯 보이나 전통에 대한 깊은 내적 성찰을 쌓으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도자가 단순 사물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서 친숙함을 발휘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한다.     

▸ 스크린의 변주

조약돌처럼 둥근 외형과 무광의 부드러운 색채를 지닌 <Flat Vase>(2017)는 김민선의 초기 작품이다. 화병의 입구와 발에 해당하는 부분이 크기가 비슷하며 배가 불룩한 형태는 전통적인 도자기의 일종인 호(壺)와 닮았다. 그러나 납작한 형태는 마치 평면을 보는 것 같은 시각적 혼란을 야기한다. 2차원적 이미지를 생성하는 <Flat Vase>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에 따른 초기 제작 방식에 기인한다. 영상 디자이너에서 도예가로 돌아온 당시의 김민선은 작품을 제작하기 전 결과물의 연출을 먼저 설정한 후 물레에 앉았다고 한다. 완성된 공예품의 ‘쓰임’ 보다는 그것이 공간에 위치했을 때의 이미지를 먼저 고려한 것이다. 때문에 초기 그의 작품은 외관이나 질감이 사진 혹은 그림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기물의 장식적 효과에 집중했던 것에 비해 2019년 <Tall Vase & Shadow>는 좀 더 진화한 양상을 보인다. 쉽게 쓰러지지 않으면서 작가의 개성이 오롯이 반영된 실린더 모양의 화병 시리즈는 도자와 철제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Tall Vase & Shadow>는 마치 폴 세잔의 회화 속 세상, 이브 클라인의 푸른색을 연상시킨다. 단순한 원기둥의 형태이나 물리적 세상의 모든 것이 원과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되새긴다면 작은 사물에 그가 담으려 했던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병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그림자’로 명명된 철제 받침은 공예품의 사용가치를 높이고, 나아가 빛에 대한 작가의 탐구가 심화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영상 디자이너로 지냈던 김민선의 ‘빛’에 대한 남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초 단위로 나누어 각각의 프레임을 수작업으로 수정하는 영상 디자인의 작업이 마치 공예의 작업 과정과 닮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영상이 현재성이라는 시간을 다룬다는 지점과 상영 당시의 쾌감만큼 휘발성이 강한 특성으로 인해 지속 가능한 예술에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도예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작업이 타인과 만나 생활 속에 살아 있을 때 진정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미적 가치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친숙함을 유발하는 기물 사용의 측면까지 고려한 ‘공예’에 대한 그만의 고심이 작품에 녹아있는 듯하다. 스크린은 물레 위의 작업으로, 재생과 동시에 증발하던 쾌감은 타인의 삶에서 오래도록 숨 쉬는 감성으로 변주되었다.   


시간을 머금은 빛

김민선의 작품은 외부 표면과 내부의 질감 대비가 크다. 단단한 느낌이지만 광택이 없는 표면은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백토에 안료를 섞어 제작했다. 반면, 내부는 재유를 사용하여 번조 후 재가 타고 남은 흔적을 안고 있다. 외부와 내부 질감의 대비는 컵이나 화병 등 그의 다수의 작품에서 반복된다. 작품의 표면이 작가의 의도적인 개입이 반영된 결과라면, 마치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키는 내부는 불과 유약이 만나는 과정의 우연성에 따른 것이다.         

       

작품 전체의 형태가 원과 직선으로 단조롭게 구성되어 있음에도, 각각의 깊이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연유는 바로 내부의 유약이 남긴 흔적과 그 미묘한 색채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형태의 다양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도예가로서 유약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겉으로 화려함을 추구하려는 젊은 세대와 다른 진지함이 돋보인다. ‘수주도예연구소’에서 유약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는 그의 열정은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몇몇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마 안에서 발포유가 끓으며 남긴 기포 구멍은 화학반응의 결과임에도 자연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유약에 대한 열정은 장작가마로 이어진다. <Wood Fired Tall & Narrow Incense Burner> (2020)는 그의 향로 시리즈 중 하나이다. 그는 장작가마에서 소성했을 때 전혀 다른 색채와 빛을 머금고 나온 작품을 본 후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높은 온도에서 움츠리고 있던 유약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은 빛이 사그라질 때 씨앗을 터뜨린다. 그 결과 동일 유약이지만 기존 작품의 풋풋한 감성과 전혀 다른 깊이와 무게를 머금은 작품이 탄생했다. 시각적 촉각을 야기하는 재의 흔적, 표면의 유약이 흘러내리는 모양은 장식적 효과와 더불어 유약 변화 과정의 운동성을 시각화한다. 고온에서의 유약 반응이 인간의 시각이 닿지 않는 범주를 벗어나 가시적 결과물인 ‘향로’로 제시된 것이다. 영상 디자이너로 활동할 당시 시간성을 다룬다는 지점에서 어려움을 느꼈다고 말을 하지만, 오히려 현재의 그는 시간의 흐름을 포획하여 지속성으로 제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가장 최근 작품인 <Drinking Ware Set for Ritual II>(2020)은 전통과 개성, 장식적 요소와 사용가치, 의도적 개입과 우연성 모두를 저울에 올려둔 듯하다. 주병에 담기는 술의 성질과 음미하기에 적당한 잔의 용량 등을 비롯하여 형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무릇 공예라는 것이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어려운 분야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역사성과 동시대적 문화, 기물의 쓰임과 미적인 차원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열정을 잃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젊은 작가들의 이 같은 고심이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면, 이는 곧 동시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며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자신을 위한 ‘의식’이 공예품을 사용하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는 작품에 자연의 섭리를 담아 작품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공명하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듯 보인다. 공예에 대한 진지함과 예리한 시선이 차분한 듯 역동적인 그의 작품과도 닮아있다. 일상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줄 컵과 전통주를 위한 주병과 잔의 후속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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