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 화폐가치
초등학교 때로 기억난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동전 한두 개를 거스름돈을 받았다. 지금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은 있어야 짜장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다. 물론 다 먹고 나면 천 원짜리 몇 장이 잔돈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매년 물가는 오른다. 공식적인 통계로 확인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상식이다. 상품의 가격은 매년 오르니 돈의 가치는 매년 떨어진다. 물가상승과 화폐가치 하락을 직관적으로 연결 시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10년이 넘는 기자 생활 중 가장 많은 기간을 금융부에서 보냈지만 나도 그랬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보통의 인식도 물가상승과 화폐가치 하락을 연결 하는데 장애물이다. 인플레이션은 '부풀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inflare'에서 파생됐다.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20세기까지 '통화량의 확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됐다. 현재 인플레이션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물건과 서비스 가격이 광범위하게 상승하는 현상으로 정의되고 있다. 지인에게 인플레이션이 뭐야,라고 물으면 "통화량 확대"라는 답보다 "물가 상승"이라는 말이 돌아올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인플레이션의 본질은 통화량이 많아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통화량의 핵심은 국가가 독점적으로 공급 권한을 지닌 법정 화폐다. 시중에 풀린 유동성이다. 법정화폐 발권력을 독점한 국가는 정책금리(한국은행 기준금리)를 활용한 통화정책으로 통화량을 인위적으로 조정한다. 경기침체기에는 물가가 상승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춘다.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사태 등과 같은 경제 위기가 닥치면 더욱 드라마틱하게 금리가 인하되고 통화량은 급격히 늘어난다. 통화량 확대, 즉 법정 화폐의 공급이 늘어나면서 발생하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까?
통계청에서 작성하는 소비자물가상승률을 보면 1968년부터 단 한 번도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없다. 물가는 매년 전년보다 올랐다. 최근으로 보면 2020년 이후 코로나 때 돈이 풀리면서 5% 대를 보이던 물가상승률이 지난해 2.3%로 낮아졌다. 2% 대의 물가상승률은 안정적인 수준이라고 인식된다. 한국은행은 '한국은행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정부와 협의해 물가안정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2019년 이후 물가안정목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기대비) 기준 2%이다.
정부가 원하는 데로 물가상승률이 관리되면 매년 돈의 가치는 2%씩 줄어든다. 물론 임금도 매년 오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물가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매년 더 많은 돈을 써야만 과거와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임광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에서 제출받은 연도별 근로소득 천분위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근로소득과 소비자물가 간의 상승률 차이는 -0.8%포인트(p)를 기록했다. 2022년(-0.4%p)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다. 매년 2%의 물가상승률이 복리로 누적되면 돈의 가치를 35년 만에 절반으로 끌어내린다는 분석이 있다.
"달러를 주관하는 미국 연준은 매년 2%의 인플레이션을 기준으로 통화량을 관리한다. 이 말은 상품에 대해 매년 달러의 가치가 2%씩 줄어든다는 뜻이다. 복리로 계산해 보면 35년 만에 달러의 가치는 절반으로 추락한다. 이 역시도 인플레이션이 이상적으로 관리될 때의 이야기다." <더 그레이트 비트코인>
화폐가치의 하락이 실질구매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일반 시민들은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돈이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매년 이어지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은 이례적이다. 정부가 관리목표로 세운 인플레이션율을 크게 넘어서지만 않으면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산다. 그래서 정부는 화폐를 적당히만 더 찍어낸다면 별다른 책임감이나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기술 발전 등으로 생산력이 상승하면 수요공급에 따라 생산품의 가격은 떨어져야 하는 것이 경제학의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적당히 관리되는 물가상승에 안심한다.
"화폐 시스템은 국가의 입장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는 분야다. 국가가 처음부터 화폐 시스템에 개입하게 된 이유다. 이와 관련해 롤란트 바더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우든 국가가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필요한 돈을 모두 합치면 천문학적인 규모가 되기 때문에 세금만으로는 어림없다. 그리하여 전 세계 국가들은 무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화폐를 만들어 내기 위해 간단하게 지폐 생산 독점권을 강탈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국가가 화폐를 다뤄온 역사는 끝없는 기만과 사기의 역사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결국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 반대로 인플레이션으로 더 많은 부를 쌓는 이들도 존재한다. 정부를 중심으로 정부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금융기관 그리고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기업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자신의 부가 다른 곳간을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근검절약을 외치며 물가상승률보다 낮은 이자를 받으며 저축의 미덕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이렇게 저축된 돈은 싸게 부채를 활용하는 이들의 부를 늘려준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재분배를 초래한다. 인플레이션은 새로 찍어서 만들어진 돈을 먼저 확보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가장 먼저 그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은 아직 변하지 않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큰 이익을 본다. 반면 새로운 돈을 뒤늦게 손에 넣은 사람들이나 아예 그 돈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들이 추가 수입을 확보할 시점이 되면 물건과 서비스 가격은 이미 오른 상태다. '최초로 새로운 돈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국가 및 은행, 그리고 (대)기업 관련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돈을 손에 넣는 사람들'은 봉급 생활자와 연금 수급자들이다. 인플레이션은 빈곤을 야기하면서 은행 시스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슈퍼 리치들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 다수의 희생을 대가로 소수가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자기 돈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만 볼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개인이 국가의 독점적 발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인플레이션은 당연한 현상이 아니고 인위적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극복하면서 누군가의 개입 없이 소유권을 지켜낼 수 있는 가치저장 수단이 필요하다. 한가지 떠오르는 자산이 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제도권 금융시장으로 들어왔다.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