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세신사와 소득재분배

인플레이션 / 자산 재분배

by 돈태

단골 사우나에서 일하는 세신사가 내게 처음 말을 걸었다. 퇴사를 한 후 집 밖에서 평일 하루를 가장 먼저 시작하는 곳이 동네 사우나다. 정기권을 끊고 꾸준히 다니니 사우나에서 일하는 분들의 얼굴도 익숙해졌다. 그들 중 몇몇과는 사우나에 들어설 때 가볍게 인사를 나눈다. 그렇지만 인사 말고 짧게라도 대화를 나눠본 적은 아직 없었다.


그늘도 평소와 같이 사우나에 갔다. 사물함 옆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근처 평상에 걸터앉아 TV를 보던 세신사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참나"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내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평일 오전이라 사우나는 한산했다. 분명히 나를 향한 말이었다. TV에서는 한덕수 총리의 탄핵 선고가 있을 예정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세신사도 내 얼굴이 익숙하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 세신사에게 자연스럽게 리엑션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말이 안 나오고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던 내 삶에 영향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입을 떼지 못했다. 세신사도 딱히 내가 답하기를 바라지 않는 눈치다.


옷을 다 벗고 탕으로 들어가는데 문득 "몇 달 전에 신문사 정치팀장이었는데 제가 보기에는"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도 했다. 비루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쳤다.




사우나를 나오고 한 총리의 탄핵안이 기각됐다는 뉴스를 접했다. 감흥이 없었다. 대신 다른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조세·복지제도 통한 소득 재분배’ 한국, OECD 28위.' 한 일간지 지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소제목이 더욱 눈길을 잡았다. '윤 정부 긴축에 더 나빠질 듯.'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 수준이고, 윤석열 정부의 긴축재정과 감세정책으로 순위가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는 정도다. 국가별 순위를 매긴 근거는 OECD 통계자료에 나온 세전·세후 지니계수 개선율이다. 2022년 수치를 기준으로 했다. 2022년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데 기사는 윤석열 정부를 말하고 있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 지수다. 지니계수가 ‘0’이면 완전 평등, ‘1’이면 완전 불평등이다. 수치가 낮을수록 한 나라의 소득이 평등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반대로 수치가 높을수록 그 나라의 소득이 양극화됐다는 의미다. '소득 재분배 기능'은 세전 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와 세후 소득 지니계수의 격차를 평가한 것이다. 세후 소득 지니계수가 낮아질수록 그 나라의 '소득 재분배 기능'이 좋다는 의미다.


기사는 질보다 양을 앞세우는 경제관을 은근히 담고 있다. 재정이 어떻게 쓰이는 지보다 얼마나 쓰이는지가 방점이다. 정부는 되도록 세금을 많이 거둬서 최대한 많은 재정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논리다. 이른바 '큰 정부'를 통한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결국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이 때문에 기준 시점이 벗어나 윤석열 정부를 겨냥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세금도 덜 걷고, 재정도 덜 썼다고 정의 내렸다.


이런 시각은 당연히 국가의 개입이 없다면 소득 불평등은 커진다는 논리로도 이어진다. 본질보다는 수치로만 드러난 현상에 초점을 맞춘 수박 겉핥기식 문제의식이다. 국가가 과연 소득불평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그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가 진짜로 국가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생략됐다.




"통화량 확장을 통해 수입과 재산이 재분배된다. 일반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은 층에서 높은 층으로 재분배가 이뤄지며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진다."


최근에 출판된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에서는 정부의 독점적 화폐공급 시스템으로 인해 부의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법정화폐의 공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정부가 확장적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상승을 상식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람들이 보유한 돈의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더욱이 지속되는 물가상승으로 소득이 재분배되는데, 가장 수혜를 입는 대상으로 정부와 기득권을 지닌 집단을 지목하고 있다. 정부가 독점권을 지닌 법정화폐 체제의 통화정책은 부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책의 핵심 논지다.


이 같은 문제의식과 논리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의 어원을 따져보면 설득력이 높아진다. 인플레이션은 '부풀리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inflare'에서 파생됐다.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20세기까지 '통화량의 확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현재의 상식은 '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이다. 결국 현재 통용되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인식은 화폐가치 하락을 연상하는데 방해물이다. 정부가 계속 돈을 찍어내고 있다는 본질은 물가상승이라는 현상에 가려진다. 가만히 있어도 매년 내 돈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결론적으로 '소득 재분배 기능'을 말하려면 정부가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화폐 시스템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당신들한테 부가 저절로 이동되는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왜 당신들에게 부의 분배를 맡겨야 하는지.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사이페딘 아모스가 쓴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 가>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화폐가 더 이상 기득권의 전유물이 아님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보험이다. 대중은, 즉 우리는 오웰식 미래에 대비한 보험을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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