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함께, 첫 출근

<올바른 고기> 9장.

by 돈태

솔향에게 활동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한 다음 날 아침,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얼굴로 눈을 떴다. 임시 보호소 특유의 냄새와 온기가 사라진채 눈을 감은 아기돼지 그리고 아기돼지 앞에 서있던 솔향의 표정이 뒤섞여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한참 있었다.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개인 계정으로 무지개 프로필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커서는 잠깐 깜빡이다가 멈췄다. 그는 길게 쓰지 않았다.


“전에 말씀하신 사무실 구경 언제가 좋을까요?”


보내기를 누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오늘 오후는 어떤가요?”


그는 한 박자 늦게 ‘네’라고 답했다.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동물과 함께’ 사무실은 생각보다 더 번듯했다. 건물 로비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올라갔다. 문을 열자 넓은 공간에 책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벽 한쪽에는 지난 캠페인 포스터들이 정리돼 걸려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고, 커피 머신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스팀 소리가 났다.


그는 잠깐 서서 그 풍경을 바라봤다. 소음은 있었지만, 보호소의 냄새는 없었다. 진흙도, 사료 포대도, 축축한 헛간 냄새도. 대신 복사기에서 막 나온 종이 냄새와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런 게 일반적인 조직이구나.'


그는 곧 무지개 프로필을 따라 회의실과 편집실, 자료 보관실을 둘러봤다. 벽마다 붙은 일정표와 캠페인 체크리스트, 후원 관리 대시보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급하게 뛰지 않았다. 대신 각자의 속도로, 그러나 끊기지 않는 흐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대충 분위기는 알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커피 한 잔 더 하면서 이야기할까요? 전에 만났던 곳으로 가죠.”


그들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후의 햇빛이 유리 외벽에 반사되어 눈이 잠깐 부셨다. 커피숍에 들어서자 , 남자가 말했다.


“사무실은 어땠어요?”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체계가 있어 보였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체계는 필요합니다. 특히 오래가려면요. 체계가 목적이 되면 안 되지만...”

커피가 나왔다. 잠깐의 침묵 뒤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직 제 이름도 말씀 안 드렸죠. 김수영입니다. 비인간 해방단에서는 저를 무지개 프로필이라고 부른다면서요."


남자는 말을 마치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네...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 솔향이라는 친구 있죠? 그 친구랑 며칠 전 통화화했어요."

"아... 네."


그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앞으로 동물과 함께에서 일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수영의 입에서 솔향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수영이 화제를 바꾸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까 보여드린 건 일의 표면입니다. 내부는 더 지루하고, 더 정치적이에요. 회의가 많고, 설득이 필요하고, 숫자를 맞춰야 합니다. 현장은 줄어들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맡아야 합니다.”

그는 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아직 현장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수영이 곧바로 받았다. “현장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 최소한 기준이 흐려지지 않습니다. 방금 본 사무실에서, 현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 오면… 저는 뭘 하게 되죠?”

“콘텐츠 기획과 편집을 중심으로, 캠페인 설계까지 같이 봅니다. 처음부터 다 맡기진 않겠지만. 대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집니다.” 남자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자원을 쓰게 될 겁니다. 더 많은 타협도 해야 하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헛간의 냄새, 진흙, 숨이 가쁘던 아기돼지의 배. 그리고 오늘 본 조용한 사무실. 두 장면이 겹쳤다. 그때 수영이 그의 마음 잡았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던 걸로 압니다. 너무 신중한 것이 때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죠."

그는 컵을 내려놓았다. “오늘… 사실은 마음을 먹고 왔습니다. 언제부터 출근을 하면 될까요?"

"당장 내일도 됩니다." 수영은 말하며 미소를 지었고, 그도 수영을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역할, 일정, 급여, 그리고 책임의 범위. 그는 모든 걸 받아 적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것들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커피가 식었을 때쯤, 그는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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