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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25. 2024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조동범

오늘도 지극한 허무를 견딘다

서늘한 시체공시소에 누운 시신은 이름이 없다. 치아와 지문,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유추할 뿐이다. 끝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시신은 영원히 호명할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이름 없는 변사체로 스러져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이는 역시 이름 모를 어느 검시의다.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한 망자들은 레테의 강을 건너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 그들은 비로소 망각의 강물을 들이켠다. 우리는 범죄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시신이 조각나고 해체된 뒤, 다시 봉합되는 장면을 지켜본다. 슬픔과 흐느낌을 떠나보낸 죽음이 한결 가벼워지듯, 부검을 위해 장기가 적출된 그들은 육신의 무게를 덜어낸다. 우리에게는 절대 다가오지 않을 죽음의 방식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모든 죽음은 결국 의문사다. 납득할 만한 죽음이 가당키나 한가. 조동범의 시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부검대에 누운 신원 불명의 시신이다.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표지와 저자 조동범

‘손톱 밑에 가득한 소문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깃들어 자꾸만 누군가의 악몽을 대신 꾸려한다. 밤하늘은 이제 불길한 별자리의 예언을 절뚝이며 더 이상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내 몸의 상처를 어루만지면 그곳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증언은 흘러나오겠지. 길게 자란 머리칼은 어느 먼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와 마주 앉은 기쁨과 슬픔, 원망과 분노의 문양들을 호명하며 현생의 모든 선과 악이 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나지 않는 일이고, 내 이름은 그저 제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할 수 없는 밤과 낮을 보내며, 고요하고 창백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흐느낄 수 없구나.’      -‘제인 도’ 중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 시신을 제인 도(Jane Doe)라고 부른다. ‘손톱 밑에 가득한 소문’은 ‘나’를 살해한 누군가가 남긴 DNA일 수도, ‘내’가 죽어가며 움켜쥔 물건의 잔해일 수도 있다. 검시의가 ‘몸의 상처를 어루만지면’ ‘나’의 죽음은 과학적 방식을 통해 해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은 ‘이미 기억나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나’는 무(無)로 돌아간다. 이제 제인 도는 ‘고요하고 창백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흐느낄 수’ 없는 비존재다. 조동범의 시 세계에서 화자들은 이미 죽었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죽음이 그렇겠지만 그들의 최후는 지극히 고독하다. 그들은 먼 우주 공간에 홀로 놓인 우주비행사(‘휴스턴’)이며 이미 오래전, 해변의 묘지에 묻힌 고인들(‘친애하는 고인들’)이다. 화석이 되기를 기다리는 생물(‘종의 애도’)과 얼음 물고기(‘얼음 물고기’)는 모래와 얼음 속에 유폐되어 있다.     


그들이 마지막 순간 떠올리는 기억의 편린은 ‘투명하게 담긴 올리브와 햇살이 쏟아지던 체크무늬 커튼’(‘휴스턴’)이거나 ‘냉장고에 두고 온 두부조림’(‘입동’)처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문득 ‘기쁨과 슬픔, 원망과 분노의 문양들을 호명(‘Jane Do’)하는 일들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현생의 모든 선과 악’(‘Jane Doe’)이란 살아 있는 자의 도덕이자 당위이며 망자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니다. 그들은 가만히 소멸을 받아들이며 ‘회한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으려’(‘1월’) 애쓴다. 삶에 계속 원한을 품는 일은 곧 망자가 될 이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히느니 ‘흘러간 것들을 호명하지 않기로 한 당신의 다짐’(‘1월’)이 의연하다.      

그들이 죽어갈 때, 그들이 속한 세계 역시 막을 내린다. 한 종이 사라질 때, ‘모든 애도의 방식’(‘종의 애도’) 역시 사라진다. ‘문자들은 단 하나의 의미만을 위해 모든 상징을 폐기’(‘수취인’)한다. 하나의 언어는 오직 특정한 부족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엽서가 당도할 때, 우편함은 어느덧 폐허를 기록하며 폐기된 밀약들을 기억할 수 없’다.(‘수취인’) 때로 소멸과 기록 사이에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막 지구에 도달한 별빛과 별 사이에 수만 광년이란 간극이 존재하듯이.      


망자, 혹은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존과 제인이란 가명이 부여된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모두 같은 가명으로 불리는 무명의 존재다. 존과 제인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이 베일에 가려진 망자가 있다면, 그의 탄생이 수수께끼로 남은 망자가 있다. ‘생의 최초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의 묘비명’(‘친애하는 고인들’)에서 ‘알 수 없는 전생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진정한 소멸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슬픔과 불행은 ‘기억할 수 없는 기원전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고 막막’하게 변한다. 죽어가는 어느 물고기에게도 ‘나의 꼬리와 너의 꼬리가 물살을 가를 때, 난류와 한류의 경계가 출렁일 때’, ‘아가미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감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충만한 생명력은 오직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바다의 서늘한 결을 어느덧 잊’은 지느러미는 태양 아래 꾸덕꾸덕 말라간다.     


‘오래 전의 황폐한 서사는 믿을 수 없는 폐허’(‘친애하는 고인들’)가 된다. 죽음이란 거대한 허무는 살아 있을 때 천착하던 모든 의미를 쓰나미처럼 휩쓸어 간다. 죽음은 어떤 의미도 동반하지 않는다. ‘국경 인근의 저수지에서 발견된 익사체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누군가의 영웅담이 아니다.’(‘영웅담’) 희생과 대의란 전선(戰線)을 만드는 장군들의 조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들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신성’(‘개와 늑대의 시간’)을 외면한다. ‘사제들의 음성은 죽어버린 신들을 호명하려’ 해도 신은 응답할 수 없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잘린 혀’가 나뒹구는 참혹한 광경만이 신의 부재를 알려준다. 그러나 부조리와 무의미는 생의 본질일 뿐이다.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만, 육신은 유한함에 묶여 있다. ‘썩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밤과 낮을, 당신은 흐느낄 수조차 없’(‘플라세보’)는 이유다.     


그러나 그들 앞에 주어진 무채색 세계가 완전한 공허를 뜻하지만은 않는다. 조동범의 시 세계에서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한다.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은 종말을 목표로 진행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존재는 파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조동범의 시는 선형적(線形的)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다. 수평선과 해안선, 국경선과 등고선을 포함한 모든 선(線)은 날카로운 끄트머리이자 경계이다. 그러나 선이란 뫼비우스 띠의 접합선처럼 회귀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새로운 융합과 생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선이란 때로 인위적이고 선언적인 경계다. ‘나’는 국경선 앞에서 ‘국가와 민족과 역사의 부질없음을 문득 중얼거’(‘John Doe’)린다.      

수평선과 지평선 너머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없을 때도, 선의 안팎에서는 첨예한 대립과 소멸, 생성이 일어난다. 일몰과 일출, 삶과 죽음, 종의 출현과 멸망이 이어진다. 시인은 촘촘한 언어의 그물망으로 무한한 순환 속에서 스러져가는 존재들을 건져낸다. 그들은 ‘침몰한 전함이나 보물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전설’(‘호라이즌’)이며 ‘소녀의 끊어진 발목마다 흘러나오는 돌이킬 수 없는 옛날이야기’(‘이야기의 끝과 시작처럼’)이다. ‘필경사가 기록하지 못한 오래전의 이야기’(‘드라이플라워’)는 시인의 펜 끝을 통해 잠시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우리 없이 이어질 무심한 미래는 우리가 딛고 선 지금에 맞닿아 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지극한 허무를 마주하고 견딘다.      


조동범 시인은 하루의 대부분을 읽고 쓰고 강의하며 지내는 강의 집필 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020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다.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비평집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등을 출간했다. 김춘수 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당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조동범, 천년의 시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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