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성범죄를 향한 세 사람의 시선
'라스트 듀얼'의 마르그리트
여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은 강간이 아니라, 서로 원해서 가진 관계였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이 해묵은 설전이 중세에 발생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영화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 2021)'은 실제 14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에릭 재거가 쓴 동명의 역사서는 거장 리들리 스콧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됩니다. 영화는 피해자 마르그리트, 그녀의 남편 장, 남편의 친구이자 가해자인 피에르의 같은 사건을 대하는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줍니다.
성범죄를 두고 세 명의 인물이 각기 다른 사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라쇼몽’에서 실체적 진실은 어슴푸레한 영역에 감춰져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색되기 마련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없다는 것이 라쇼몽의 주제입니다. 객관적 사실이란 경험하는 이의 주관에 의해 해석된 사실일 뿐입니다. 인물 각자가 자신의 기억으로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라스트 듀얼’의 구성은 라쇼몽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라스트 듀얼’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의 기억이 진실과 가장 근접하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과연 세 인물 중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일까요?
영화는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말 위에 오른 두 남자를 비추며 시작합니다. 결투를 앞둔 두 사람의 표정은 비장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한 여인의 얼굴에서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세 사람은 한때 친한 친구였던 장 드 카루즈와 자크 르 그리, 그리고 장 드 크루즈의 아내 마르그리트 드 카루즈입니다. 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자리에 섰을까요? 서로에게 창을 겨눈 두 남자가 말을 달리며 화면은 암전됩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유럽에서 횡행했던 특수한 제도에 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증인이나 증거가 부족한 민형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결투를 통해 승패를 가르는 재판 제도가 존재했습니다. 이긴 사람은 승소하고 진 사람은 목숨을 잃을 뿐 아니라, 시신이 전시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할뿐더러 야만적인 제도입니다. 중세는 종교가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던 시기였습니다. ‘신은 옳은 자의 편이다’라는 관념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이러한 재판 형식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배심제와 증인신문제도 등 사법제도가 완비되며 결투 재판은 점점 사문화되어 갑니다. 영화에서도 국왕 샤를 6세가 결투 재판이 이미 적법하지 않은 제도가 아니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파리 고등법원의 허가를 받은 마지막 결투 재판을 소재로 합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장 드 카루즈의 시선으로 그간의 사정이 드러납니다. 영주 피에르의 명을 받아 전장으로 간 카루즈는 퇴각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카루즈는 적군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전투를 시작합니다. 용감하게 싸우던 그는 친구 자크 르 그리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하지만 전투는 결국 패배로 돌아가며, 카루즈는 영주 피에르의 미움을 삽니다. 영주를 대신해 조세를 걷으러 온 자크 르 그리에게 카루즈는 넉넉지 못한 형편을 고백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또 다시 카루즈는 전장에 뛰어듭니다. 종군을 마치고 돌아가던 그는 로베르 드 티부빌이라는 인물의 성에 머물게 됩니다.
카루즈는 티부빌의 딸 마르그리트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카루즈는 지참금으로 알짜배기 땅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주는 밀린 조세를 대신해 그 땅을 빼앗아 자신이 총애하는 르 그리에게 주고 맙니다. 이제 옛 친구들의 사이는 소원해집니다. 카루즈는 아첨과 사교에 능한 르 그리가 자신을 제치고 영주의 편애를 받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현명한 마르그리트는 르 그리와 척지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카루즈는 아내와 함께 르 그리가 오는 연회에 참석합니다. 카루즈는 화해의 의미로 아내에게 르 그리와 입맞춤하도록 합니다. 다시 전쟁터로 떠난 카루즈는 패배하여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열심히 싸운 대가로 기사 직위를 얻습니다. 참전 수당을 받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돌아온 카루즈에게 마르그리트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합니다. 식구들이 집을 비운 날, 르 그리가 찾아와 자신을 강간했다는 것입니다. 카루소는 흐느끼는 마르그리트를 다정하게 안아주며, 그녀를 위해 복수할 계획을 세웁니다. 어차피 르 그리의 편을 들 것이 뻔한 세속 법정에 서는 대신, 결투 재판을 신청합니다.
이제 르 그리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질 차례입니다. 르 그리의 기억은 카루즈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영주가 퇴각 명령을 내린 전장에서 카루즈 홀로 적진에 돌진합니다. 카루즈의 아버지마저 주저하는 상황에서 르 그리는 카루즈를 구하기 위해 용맹하게 그의 뒤를 따릅니다. 전투 중에 카루즈가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지만, 서로 빚을 진 셈입니다. 영주는 명을 따르지 않은 카루즈를 아둔하고 고집이 센 데다가 지루한 인간이라며 욕합니다. 르 그리는 그 상황에서 오랜 친구인 카루즈를 두둔합니다.
연회에서 마르그리트와 마주친 르 그리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자신에게 머무르는 마르그리트의 눈길을 추파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마르그리트와 일자무식인 카루즈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이릅니다. 르 그리는 어릴 때,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덕분에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교양 있고 재치 있기에 파티의 흥을 돋우는데 빠져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하지만 르 그리는 주색잡기에 빠져 사는 쾌락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르 그리는 자신이 마르그리트를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여태껏 많은 여자와 가벼운 연애만을 즐겼던 르 그리로서는 특별한 감정입니다. 그는 마르그리트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카루즈가 집을 비운 어느 날, 그는 시종을 데리고 마르그리트를 찾아갑니다. 마르그리트에게 일방적으로 고백한 뒤, 몸을 피하는 마르그리트를 쫓아갑니다. 르 그리가 원탁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대치합니다. 빙글빙글 돌며 여성을 붙드는 일은 얼마 전 영주 피에르가 연 연회에서도 벌어진 일입니다. 이제껏 르 그리에게 여성의 ‘관습적 저항’은 흥분을 돋우는 전희의 일부였음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마침내 르 그리는 저항을 멈춘 마르그리트와 사랑을 나눕니다.
마르그리트가 그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자 그는 당황합니다. 르 그리는 그녀가 느낀 감정을 간통에 대한 죄책감이라 여깁니다. 세속 법정에서 마르그리트를 강간했음을 인정하면 그는 가벼운 처벌만을 받습니다. 성직자 특권이 있는 데다가 영주의 비호를 받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르 그리로서는 마르그리트를 강간한 기억이 없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의 명예와 관련된 일입니다. 마침내 르 그리는 카루즈와 결투를 벌이기로 결심합니다.
이제 마르그리트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르그리트가 이야기하는 진실’이라는 자막이 나온 뒤 ‘The truth is'라는 글자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은 피해자인 마르그리트가 바라본 사실이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합니다. 카루즈는 자신을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남편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가 보는 앞에서 카루즈는 장인과 지참금을 협상합니다. 그들의 결혼이 정략결혼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잠자리할 때도 카루즈는 마르그리트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만족했냐고 묻는 카루즈에게 마르그리트는 의례적으로 그렇다고 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는 아내로서 의무를 다합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챙기고 카루즈가 집을 비우면 영지를 관리합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입니다. 마르그리트는 현명하고 똑똑한 여성이어서 카루즈 없이도 영지를 잘 관리합니다. 오히려 카루즈가 없는 편이 영지 관리에 유리할 지경입니다. 카루즈의 오랜 친구 르 그리에게 화해하라고 권한 사람도 마르그리트입니다.
카루즈의 권유로 르 그리에게 입맞췄을 때, 마르그리트는 그녀를 향한 르 그리의 눈빛에 부담감을 느낍니다. 계속되는 르 그리의 추파에 그녀는 남편과 그의 관계를 고려해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줍니다. 마르그리트는 르 그리가 잘생기고 매력 있는 남성이라 생각하지만,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라 여깁니다. 남편이 집을 비운 날, 르 그리가 느닷없이 그녀를 찾아옵니다. 그녀가 겁탈당하는 상황은 르 그리의 기억과는 전혀 다릅니다. 도망치는 마르그리트를 좇는 카메라 워크는 크게 흔들리며 마르그리트의 두려운 심정을 반영합니다.
르 그리의 기억 속에서 그녀가 침실 앞에 벗어놓은 실내화는 다급한 여성이 그랬다기에는 너무나 가지런합니다. 실제로 마르그리트가 벗어던진 신발은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겁탈당하는 그녀의 눈물과 콧물이 흐르는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마르그리트는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르 그리에게 겁탈당했음을 털어놓습니다. 카루즈는 그녀를 위로하기는커녕, 그녀의 멱살을 잡고 강간당한 것이 사실이냐고 캐묻습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안은 사람을 르 그리로 남겨둘 수 없다며, 그럴 준비가 되지 않은 마르그리트를 침대로 이끕니다.
이처럼 세 사람이 말하는 진실은 서로 다릅니다. 원래 개인의 기억이란 선별적이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관객은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에 설득력을 느낍니다. 피해자가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에 깊이 공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마르그리트는 세 사람 중 제일 합리적이고 현명한 인물로 비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 시대의 많은 여성과는 달리 자신이 당한 일을 묻어두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밝히고 르 그리를 처벌하기를 원합니다.
마르그리트는 법정에서 심문받습니다. 그 시절 강간범을 처벌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강탈하는 것은 그 여성을 소유한 남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기에는 여성이 성관계에서 절정을 느껴야만 임신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강간을 당한 여성은 임신하지 않는다는 속설 역시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법정에 선 마르그리트의 배가 불러있습니다. 르 그리의 아이인지, 남편의 아이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강간당한 직후에 임신했으면, 강간이 아니지 않냐는 질문이 마르그리트에게 주어집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절정을 느꼈느냐는 질문도 주어집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르그리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차분하게 답변합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이 결투에서 지면 자신 역시 화형 당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성폭행을 당했다며 남성을 무고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무시무시한 형벌인 셈입니다.
마르그리트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재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남편에게 외칩니다. 마르그리트가 바란 것은 정당한 처벌과 사과였습니다. 남성들이 목숨을 거는 명예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갓 태어난 아들과 소박한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명예라는 허울뿐인 가치가 구체적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중세의 법정 역시 그녀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합니다. 르 그리에게 잘 생겼다고 말했다는 친구의 증언이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잘 생겼다는 평가가 그와의 잠자리를 원한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여성들도 그녀의 편이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그녀를 몰아세웁니다. 시어머니 역시 젊은 시절 같은 일을 겪었지만, 그냥 넘어간 일이 있습니다. 며느리의 마음을 이해하기는커녕, 자신과 달리 일을 키우는 그녀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믿었던 친구는 마르그리트가 르 그리의 외모를 칭찬했다고 그녀에게 불리하게 진술합니다.
영화는 다시 처음의 결투 장면으로 되돌아갑니다. 몇 번의 격투 끝에 두 사람은 말에서 떨어져 육박전을 벌입니다. 마음을 졸이는 몇몇 사람들과 달리 관중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중세인들에게 결투란 지루한 생활 끝에 주어진 오락거리에 불과하니까요. 마침내 카루소의 칼끝이 그의 얼굴을 겨눕니다. 죄를 고백하라는 카루즈의 말에 르 그리는 ‘하나님께 맹세코 강간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르 그리는 여전히 마르그리트의 동의가 있었던 관계였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그 자신에게만은 진정했습니다. 분노한 카루즈는 ‘거짓’을 고하는 그의 입을 찔러 살해합니다. 르 그리의 시신은 벌거벗겨져 말에 끌려가 광장에 전시됩니다.
마르그리트는 다시 찾은 평화 속에서 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르 그리와 카루즈 중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마르그리트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년 뒤 카루즈는 십자군 전쟁에서 사망합니다. 마르그리트는 재혼하지 않고 30여 년간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그렇습니다. 마르그리트의 삶에는 남성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남편과 친구의 부인을 겁탈하는 남성이 사라진 이후에야 마르그리트는 진정한 행복을 되찾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강간당했음을 밝히는 마르그리트는 악녀 취급받습니다. 남편은 마르그리트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웁니다. 강간범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죽을 때까지 그녀를 사랑해서 벌인 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15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어떤 관객은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의 기억에서 연속으로 반복되는 장면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기억은 조작되고 선택됩니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규명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법제도가 아니라 우연한 방식에 의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바란 정의는 구현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관객은 비이성적인 중세의 관습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인의 눈으로 본 야만은 당대에는 상식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버젓이 여성에 대한 야만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현대에 태어났어도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모욕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같은 성폭력을 겪어도 그에 반응하는 태도는 여성에 따라, 그가 속한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여성은 지독한 수치심을 느끼고, 어떤 여성은 분노를 느낍니다. 비교적 가볍게 고통을 극복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는 여성의 옷차림, 직업, 태도, 순결성의 여부로 ‘피해자다움’을 규정합니다.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피해자가 느끼는 절망에 공감하게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아니요’는 ‘예’가 아닌 ‘아니요’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