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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강 Dec 15. 2020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무게감

마음만은 리갈하이


학생 신분일 때 입시학원에서 강의를 하거나 과외를 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지만 제법 책임감을 가지고 강의에 임했었고, 저도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학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는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하면 전공과목과 교육학에 대하여 충분한 전문적인 지식을 보유한 상태에서 사명감을 갖고 미래의 인재를 교육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직업인데, 저는 국어문제를 쉽게 푸는 방법, 글을 예쁘게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학교와 학원에서 열심히 제자들을 지도하고 계신 수많은 선생님들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주제에 맞지 않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서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금까지도 종종 ‘선생님’이라고 불릴 때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생(先生), 일본어로 ‘센세이(せんせい)’라는 호칭으로요.       


일본에서는 변호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일본 드라마를 애청하는 분들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지만, 변호사를 호칭할 때는 성씨 뒤에다가 붙여 ‘○○ 센세이’라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한국 변호사의 경우에는 성씨가 김씨라면 ‘키무 센세이’, 필자처럼 성씨가 이씨라면 ‘리 센세이’ 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죠.       


로스쿨을 다닐 때 일본에서 법정 드라마인 ‘리갈하이’가 방영 중이었는데, 저도 무척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사카이 마사토와 아라가키 유이가 연기를 너무 멋지게 잘한 것도 있지만, 특히 저를 감명시켰던 것은 드라마의 전문성과 흡입력 있는 스토리였습니다. 한국은 일본과 같이 대륙법계 국가이고, 법률의 제정 및 개정에 있어서 일본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특히 민법의 경우에는 한국법과 일본법이 매우 유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중 에피소드에서 다루어지는 법적 쟁점에 국내 법률을 적용하더라도 동일하게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어서 전공자 입장에서 감탄하면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변호사 코미카도(사카이 마사토)는 매우 어렵고 위험한 사건(의뢰인)만을  수임하는데, 변호사로서 저렇게 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아슬아슬한 막장행위를 일삼으면서도 아슬아슬한 순간에 고강한 법리 혹은 재치를 통해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해결되는 사건의 이면에는 인생의 교훈점도 늘 존재하죠. 아무래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오버스럽고 각색이 많이 이루어진 면이 없지는 않지만, 리갈하이는 법률가의 관점에서 봐도 고증도 잘 되어있고 매우 잘 만들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법정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드라마를 보면서 장래에는 ‘코미카도’처럼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는 변호사가 되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습니다. 물론 합리적인 관점에서 ‘마유즈미(아라가키 유이)’ 같은 직장동료가 있을 것은 기대하지 않은 채로 말이죠.      


운이 좋게도, 현재 재직 중인 로펌에서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변호사님이 일본 변호사들과 교류도 활발히 하시고 일본사건도 수임하시는 덕분에, 자연스럽게 저도 민사, 형사, 가사, 기업자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사건을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처음 일본 고객으로부터 ‘센세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을 때 기분이 묘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존경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센세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변호사는 ‘센세이’라고 불리는 몇 안 되는 직업에 해당합니다. 그만큼의 훌륭한 전문지식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막중한 책임감이 기대된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센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될 때마다, 본인도 모르게 괜히 더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사건을 수행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상은 우리와 매우 유사한 법체계를 가지고 있고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법문화는 확실히 우리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포가 크고 모든 게 다 빠릅니다. 계약도 빨리 체결하고, 투자도 빨리 이루어지고, 갈등이 발생하면 소송을 포함한 각종 법적 절차도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는 편입니다. 자연스럽게 소송에서도 법률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이 급하게 체결된 법률관계로 인한 당사자 간의 견해 차이인 경우가 제법 있고, 재판 도중에도 입증자료를 추가로 입수하거나 제출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법원도 되도록이면 쟁점을 빨리 정리하려고 하며, 증거는 빨리 제출하거나 필요한 증거신청을 빨리 마치도록 독려합니다.       


반면에, 일본의 경우, 사람이나 기업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의 관점에서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절차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면, 언제 소송을 제기하면 좋은지, 승소 확률은 %로 얼마나 되는지, 소송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는 없는지에 대하여 변호사의 의견을 매우 꼼꼼하게 체크합니다. 이 상황에서 기업고객이라면 변호사가 제시한 의견을 토대로 무수히 많은 단계의 결재를 거치는데, 길면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고객을 대리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히려 변호사가 자료제출이나 의사결정을 독촉하는 경우가 빈번하고, 소송을 쉽게 진행할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사건의 난이도가 올라가버리는 경우도 제법 발생합니다. 입증자료를 적시에 제출하거나 의견서를 빨리 내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사건인데, 제 때에 결재가 나지 않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게 되면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일본법원은 한국법원보다 소송 진행이 무지하게 느립니다. 동일한 사실관계의 사건을 저희 사무실은 한국법원에, 일본 변호사님이 일본법원에 각 제소하여 함께 진행한 적이 있는데, 1년도 안 되는 기간 내에 한국법원에서 1심판결이 선고된 것을 보고 일본 변호사님이 무지하게 놀라셨던 적이 있습니다. 일본법원에서는 사건이 이제야 막 정리되고 있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리고 해당 사건은 아직 일본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 변호사를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전자소송인데, 전자소송 도입을 통해 서면 제출이 온라인으로 가능하게 되면서 국내 민사소송절차가 더 빨라진 측면도 존재합니다. 상대방이 전날 제출한 준비서면을 읽고 재판 당일 아침에 반박서면을 제출하는 게 한국에서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 변호사들은 기겁합니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그래도, 제 개인적인 감상이긴 하지만, 일본에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습니다. 다소 느리긴 하지만 그 신중함 속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하고, 딱딱하긴 하지만 정돈되고 예의 바른 고객의 태도에 변호사로서 책임감을 되새기게 되기도 하고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매력에 일본사건을 수행하는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선생님’이란 호칭은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으로부터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면, 아직까지도 쑥스럽기도 하고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더 열심히, 성실하게, 그리고 프로페셔널하게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각오를 다짐하게 됩니다. 


마음만은 리갈하이의 코미카도 같은 실력 있는 변호사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변호사가 되어 언젠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조금은 덜 쑥스럽게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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