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를 본 후 다음날 레이네에서 첫 아침을맞이하였다. 전날의 오슬로(Oslo)에서 레이네(Reine)에 이르는 장시간에 걸친 여정과 오로라로 인해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밤늦게 잠든 탓에 늦게 일어날 줄 알았지만 그래도 일찍 눈이 떠졌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침실이 넷, 거실 하나, 주방 하나 그리고 화장실을 겸한 샤워실이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지하에 세탁실과 함께 있었다. 성인 여섯에 청소년 둘이 함께 사용하는데 화장실이 마음에 걸렸다. 집중적으로 화장실 사용할 시간대에 벌어질 일을 생각해 보니 약간 난감하기도 하였는데, 막상 현실로 와보니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시차가 유리하게 작동한 탓인지 나와 김형제님은 거의 6시 이전에 서로 앞다투듯 눈이 뜨여져 일어났기 때문이었다.이어서 아내와 양자매님과 S형제 부부가 일어났고 우리의 청소년들은 역시 좀 늦게 일어났다. 덕분에 화장실 앞 정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 가정 한집 살기는 이렇게시작되었다.
오전에비가 온다는날씨 예보와는 다르게 구름이 살짝 낀 상태여서 마을을 둘러보며 아침 산책을 갈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었지만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가끔 승용차가 지나다닐 뿐이었고 어쩌다 아침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뒤편으로 밤새 지나간 안개와 눈이 되어 내렸을 비가 일정 고도 위의 산들에게 흰 모자를 씌어 놓은 듯 눈을 반쯤 뒤집어쓴 산들의 진영이 펼쳐져 있었고 이 산들을 배경으로 희고 짙은 붉은색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어,이집 저집 들러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야기가 도란도란 흘러나오는지 듣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눈물짓고, 함께 걷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쩌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한두 명의 지역주민만 보일 뿐 마을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건만 사람들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걷다 보니 다시 돌아와 숙소 근처로 오는데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쪽이 약간 언덕길처럼 솟아 있고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어 그리로 가 보았다. 나보다 먼저 나와 산책하고 계신 김형제님도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주변 자연풍광이 품은 레이네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몇 안 되는 뷰포인트 중 한 곳이었다. 우리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인데 아침에 다른 곳을 헤매고 다닌 셈이었다. 이후로 우린 이곳에서 거의 매일 사진을 찍었고 그때마다 레이네 마을은 다른 옷을 입고 나오는 패션모델처럼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을을 산책하기 위해 도로를 따라 걸었지만 간간히 지나는 차들과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 뿐 적막하였다.
일정 고도 위로 밤새 안개와 눈으로 하얗게 된 산들이 장엄하게 진치고 있었다.
걷다 보니 레이네 마을 전경이 보이는 뷰인트 중 한 곳에 도착하였는데 우리 숙소 바로 근쳐여서 숙소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곳이었다.
135mm 단렌즈로 보니, 저 멀리 정박해 있는 배와 그 너머 눈 덮인 뾰족한 산봉오리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아침에 맑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레이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안개와 빗방울을 보내기 시작하여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식사시간도 다 되었기도 하고 지금쯤이면 다들 일어났을 것이어서 황급히 돌아왔다. 다 같이 모여 아침 식사할 때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였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과 반사된 집안의 따뜻한 조명이 어우러진 살아있는 회화작품을 보며 즐거운 아침식사를 하였다.
숙소에서는 멀리 바다도 보이고, 동향인지라 묵는 동안 해 뜨는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맑은 아침을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맑은 날이라도 아침엔 안개와 빗방울이 수시로 내렸다 다시 해가 반짝였다 하며 다양한 기상 현상이 수시로 전개되곤 하였고 이른 아침 일어나 보면 주면 산들의 풍경은 매번 새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북대서양 날씨의 진면목을 아직 보았다고 할 수 없었는데, 로포텐 제도의 땅끝 마을 오 마을에 가서야 그것에 마주칠 수 있었다.
로포텐제도의 7박 8일간 마지막 떠나는 날 점심식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식사는 숙소에서 해 먹었다. 양자매님께서 한국에서 해오신 밑반찬에 우리가 공수해 간 라면과 식재료 그리고 S형제 가정이 가져온 육류와 다시마 등의 재료들에 더해 신선한 식재료는 이곳의 마트에서 추가로 구매하여 점심 식사를 포함하여 하루 세끼를 해 먹었다.
아침 메뉴는 주로 토마토, 감자, 버섯 등을 삶거나 오븐에 굽고, 삶은 계란이나 스크램블을 곁들인 통밀빵과 현지구입 치즈, 우유, 누룽지 등과 같은 메뉴였고 저녁은 스테이크, 대구탕 같은 요리를 해서 먹었다. S형제가 셰프급의 요리사인 데다 주부 경력 수십 년의 자매님들 그리고 성실한 조력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식사를 준비하니 매끼가 행복한 식사 시간이었다. 청소년인 Y와 J도 자연스럽게 식사준비를 도와주고 식후엔 설거지와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돌리는 일도 하였다. 나도 아침엔 토마토, 버섯 등을 오븐에 굽고 통밀빵을 토스터에 구우며 더러 식기 세팅과 식후 설거지에 참여하곤 하니, 모든 식사는 서로 기능들을 발휘해 가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무리 없이 이어졌다.
한 번은 하루 일정을 다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차 문을 닫다가 양자매님이 손가락을 차문에 찧었다. 응급상황이 발생하여 한 시간 거리 병원으로 가야 했는데 S형제 부부가 함께 해야 하였다. 이때 Y가 연어 스테이크를 오븐을 사용하여하였는데 일품이었다.
다행히 많이 기다리지 않았고 골절도 없다고 이야기 듣고 두 군데 피부봉합의 치료만으로 처치가 끝났다. 치료해 주신 분은 칠팔십 되신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이셨는데 양자매님은 놀란 마음을 잘 진정시켜 주시고 따뜻한 치료를 해주신 이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꼭 안아주며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엑스레이도 찍지 않았고 CT도 찍지 않았다. 노르웨이 의료는 거의 대부분이 공공 의료이고 일부 민간 의료가 보충적으로 제공된다. 한 단면만을 보았을 뿐이었지만의학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잉진료나 방어진료의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다소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졌지만 놀랜 가슴을 쓰러 안고 돌아온 일행들과 우리 모두는 Y가 정성스레 준비한 연어 스테이크로 모든 급작스런 긴급상황을 마무리하고 다시 평온한 로포텐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양자매님께서 다소 손을 사용하기 불편하시긴 했지만 말이다.
왼쪽은 우리가 묵었던 숙소이고 오른 쪽은 대구와 어묵을 넣어 끓인 대구탕과 누룽지이다.
간 소고기를 패티로 오븐에 구워 라면에 삶은 달걀과 함께 토핑으로 얹어 먹었다. 라면이 이렇게 고급져 질 수 있구나.
Y가 연어스테이크를 맛갈지게 준비하여 급박한 저녁을 통과한 우리 일행은 안온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조식으로 통밀빵과 샐러드, 구운 토마토, 삶은 달걀, 아보카도와 과일들
즐거운 아침식사 시간 조식에 아이들은 항상 동참하지는 못했다.
결코 실패할 수 없는 라면에 밥말아 먹기, 밥할 때 다시마를 넣는 것은 S셰프의 필살기이다.
식사 시간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아침은 다소 일정이 바쁘니 주로 저녁 식사 시간 때 식사하며 8명이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할아버지대인 김형제님 부부와 우리 부부, 그리고 아버지대인 S형제 부부 그리고 청소년인 Y와 J가 힘께 식사하며 이야기하는데 Y와 J는 싫은 기색이 없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고 때론 질문도 하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단계에서 우리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던 Y와 J는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 가는 것이, 누가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낯선 사람들과 여행을 가고 싶겠는가? 더구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 나이에 말이다. 그러나 비교적 순종적인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Y는 여행이 끝나고 얼마 안 돼 시험이 있어 책가방을 등에 지고 왔는데 내가 들어보나 완전군장 무게를 능가하였다.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들까 하였는데 노르웨이에는 여자들도 1년 6개월 군대에 의무 복무를 한다고 하고 자기 상체의 두 배정도 되는 배낭을 메고 걷는 여성들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척박한 땅에 거센 북대서양 파도를 이기고 어업을 하러 나간 남편들을 기다리며 생업을 이어간 노르웨이 여성들의 강인함은 현대 여성들에게도 내려오고 있는 듯했다.
구름 낀 레이네 마을
줌 인해 보았다.
맑은 날의 레이네 마을, 이 날은 바람이 불지 않아 육지 안으로 들어 온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