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1120]감 따는 사람 - 이선영
당신은 감나무에 올라 감을 따고
나는 멀찌감치 앉아서 감 따는 당신을 바라보네
창백한 은사시나무 옆에 주렁주렁 혈색 좋은 감나무
나는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데
아니, 열매는 바라보아야 좋은 것인데
당신은 열매란 꼭 거둬들여야 한다고
감을 달았다는 까닭에 지금 당신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그 감나무처럼
당신도 나무라면 열매를 줄 수 있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겠지
그렇다면 나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은사시나무가 되고 싶어
당신이 낑낑대며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베면서 감을 따 듯
생을 따고 시를 따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감나무가 함께 겪는 노고를 더러는 안타깝게, 더러는 무료하게 바라보며
햇빛 받아 빛나는 은사시나무의 평화와 고요와 무료함이 생이자 시이기를 바라는 사람
감을 따고 있는 당신과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의 그저 그대로일 수밖에 없는 거리
나란히 서 있는 주황 감나무와 하얀 은사시나무의 그냥 그대로가 좋은 거리
#1일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