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포스터나 심사위원이나 출연자의 치우친 성비를 통해 예견된 바이나, 그래도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요리를 경연하고 오직 맛으로 심사하리라고 기대했는데, 이번 주 공개한 회차에서 내가 응원하는 셰프들이 기량 한번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어느 주방 아저씨의 보조 역할이나 수행하다가 탈락했다. 제작진의 큰 그림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아무래도 최모 아저씨 아닐까.
초반까지도 점잖은 백수저와 경박한 흑수저가 긍정과 부정으로 대비되었는데, 최현석 아저씨가 연거푸 완장을 차면서 여러모로 물을 흐려버렸다. 첫 팀전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때 좋은 반응으로 넘어간 이유는, 직전 팀이 리더십 부재와 의견 충돌로 패배했기 때문에 그와 반대로 소통을 차단하는 독선적 리더십과 팀원의 맹목적 순응이 마치 필승 전략처럼 비친 까닭이다.
가리비를 털고 대파를 빌리는 정도는 화면에 재미있게 나왔지만, 정상급 요리사들이 모였는데 어떤 요리를 만들고 누가 무슨 역할을 맡을지 조금의 논의도 않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적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한국인들은 그런 사회생활을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나. 토 달지 않고, 까라면 까는. 앞팀이 저렇게 망했으니까 우리는 팀장 말에 저항 없이 '무조건' 따른다는 비합리적 사고에 맥락이 생겨버렸고, 이때 조금이나마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한국인이 아닌 에드워드 리뿐이다.
다만 그때도 이영숙 셰프님의 분량을 기대하던 터라, 최현석 아저씨가 남자들에게는 섭을 확보하고 가리비를 챙기라고 명령하면서 이영숙 셰프님에게는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배려니 존중이니 할 텐데, 방송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임무를 주지 않는 것은 분량을 없애는 거나 다름없잖은가? 한식 대첩을 다시 보니 다른 참가자에게 냄비를 뺏긴 이영숙 셰프님이 '나쁜 놈'이라고 하시는 장면이 나와서 몹시 웃었다.
미공개 영상이 공개되며 또 한 번 공분을 사게 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최현석 아저씨의 가자미 없는 가자미 미역국의 모티브가 실은 앞서 조은주 셰프가 개인전에 선보인 매생이 굴국이 아니냐는 것이다. 통편집 됐는데 알 턱이 있나. 그래서 광어를 가자미라고 우기는 억지를 부렸나 싶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재료를 선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삭빠른 행동이 재미로 다가온 건 사실. 잠깐이나마 도파민이 솟았다.
하지만 적당히를 몰랐다. 다음 회차부터는 아예 공정성이나 신뢰성을 잃어버렸다.
안성재 아저씨가 직접 요리를 대접하며 모수 PPL을 거하게 하더니 CU 편의점 대결을 시작했다.
대부분 라면을 이용한 메인 요리를 만들 때 혼자 디저트를 생각한 게 맞다면 전략을 잘 세웠다고는 하겠는데, 1등? 티라미수만큼 레시피가 널린 디저트가 있던가? 다이제나 레이디핑거쿠키를 커피시럽 또는 커피우유에 적셔서 시트로 사용하는, 오븐조차 필요 없어서 노오븐 레시피라 일컫는 바로 그 티라미수. 밤을 섞어서? 마롱 케이크 보면 기절하시겠네. 촬영 시기는 1월인데 공개 시점이 알 만한 과자들이 밤맛으로 우후죽순 출시되는 지금이라 더 절묘하다. 호텔 디저트보다 맛있다며 더 먹기를 자청하는 안성재 아저씨와 백종원 아저씨 얼굴에 함박웃음이 차올랐다.
곧이어 문제의 팀전이 시작됐다. 이제 시청자를 설득하거나 그럴듯하게 속이려는 노력조차 않고, 말도 안 되게 출연자들이 예상한 우승 후보 3인에게 또다시 완장을 준다. 에드워드 리를 제외하곤 이미 팀장을 해본 사람들이고, 자발적으로 팀을 이루게 했으므로 출연자들 간 권력관계가 형성됐다.
그래도 팀전인데 혼자만 돋보이고 나머지는 의견도 못 내게 하고 재료 손질만 시키려는 욕심 많은 어느 주방 아저씨와, 외국인 리더가 한국어에 서툰 점을 이용하겠다는 잔꾀를 마치 탁월한 지략처럼 말하는 이의 활약이 주를 이룬다.
결승전에 누가 오를지는 모르겠다만 둘이 붙으면 정말 가관일 것 같다. 이런 출연자들이 화면을 장악해 버리자 누가 더 자극적인 꼼수로 도파민을 치솟게 하는지 겨루는 천박한 요리쇼가 흑백요리사의 정체성이 되었고 자신의 장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요리하는 사람은 조용히 재료나 손질하는 일개 팀원으로 개인 요리 한번 선보이지 못하고 자취를 감춘다.
이 과정에서 안유성 명장 아저씨가 방출이라는 불공정한 룰로 팀에서 배척되는 장면이 그려진다. 다른 팀에서는 그래도 의견을 나누고 방출을 자원하는 모양새였으나 최현석 아저씨의 팀만은 공기가 달랐다.
이미 재료를 수급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계획까지 세웠는데, 느닷없이 각 팀에서 한 명을 방출하라는 공지가 새롭게 추가되자 모두가 혼란에 빠지는 가운데 최현석 아저씨는 딴청을 부리며 전화를 걸고 또 팀원 중 아무개에게는 지시를 내린다.
여기서 자연스레 팀장과 아무개는 방출 대상에서 제외되고, 남은 팀원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이쯤 되니 이게 요리 경연인지 정치 서바이벌인지 의심스럽다. 하기야 애초에 계급 전쟁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으니 정치가 따르고 정치질의 희생양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렇다면 제작진 멋대로 팀장을 뽑는 게 말이 되나. 출연자들이 예상한 우승 후보들이 왜 팀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시청자 투표를 받든지 팀장 선거를 하든지! 물론 개인전을 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제작진은 정치력 대결을 원하는 것 같은데, 정치력을 대결할 거면 제대로 해야잖나.
제작진이 밀어주는 출연자들이 뚜렷해지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흐려지자 더 제멋대로 점수를 줄 수 있는 '인생 요리' 미션이 시작된다.
인생 요리에 적합한 경력과 실력을 가진 출연자들은 방출이니 팀전이니 해서 거의 탈락시키고 인생을 논하기엔 가소로운 이들이 요리를 만들어오는데, 여기서 평가자의 전문성마저 의심되기 시작한다.
봉골레에 마늘을 빠뜨린 아저씨가 높은 점수를 받고 심사위원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목은, 맛을 평가하는 자질은 물론이고 자신의 식당에서 배운 메뉴를 그대로 경연에 내놓은 후배를 알고도 뽑아주는 그의 공정성까지 의심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교묘하게 따돌리며 우위를 선점하거나 어르신들 피곤하실 테니 쉬게 해 드리겠다며 버릇없이 행동하는 출연자들이 분량을 독식할수록, 경연의 매 순간 진정성을 보여주고 다른 요리사를 존중하며 요란하지 않게 능력을 증명하는 사람들은 제작진의 편향된 서사 부여 없이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경쟁자인 이모카세 셰프님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히는 정지선 셰프님의 모습이 그러하다.
다른 방송을 보면 자기주장이 강한 성격인데도 팀원이 되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제작진의 대우에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매번 필살기를 선보이며, 오로지 중식의 화려함을 알리겠다는 장르에 대한 자부심과 진정성만을 꾸준하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갈 때 진정성 있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약간의 요령도 좋고 외적 동기를 추구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흑백 요리사를 보면서 적어도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또 지양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잔머리를 굴리면서 머리 좋다, 천재다 치켜세우며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미련한 바보 만드는 세상이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또한 내 경쟁자는 나 하나뿐이고 오직 자신의 능력과 경쟁한다는 에드워드 리의 말처럼, 누구를 꺾고 밟아주겠다고 허세 부리기보다는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의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며 나는 나대로 나의 길을 걷는 성숙한 사람들이 주류인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