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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체 Jun 23. 2021

장마

Endless rain

조금만 참고 견디면 봄이 올 거야. 우리한테 왜 봄이 없겠니.


내 아버지는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빈 잔에 막걸리를 넘치도록 가득 따랐다. 올해도 어김없이 비는 내렸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감자전을 부쳤다. 감자에서 나오는 전분만큼이나 끈적한 공기가 선풍기 날개를 타고 등줄기에 닿는다. 땀인지 습기인지 모를 물방울이 등을 타고 방바닥을 적셨다. 7월이었다. 창밖이 흐리다.


곧 장마가 오려나 봐요.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아버지는 감자전을 맨손으로 쭉 찢어 입에 넣으며 다시 되뇌었다.


봄이 온다. 반드시 올 거야.




가난한 내 부모님은 가난한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조부모님은 가난한 증조부모 밑에서 자랐을 것이고 그런 대물림이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 대물림의 끝에는 내가 있다. 나는 이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는 조금도 않다. 내 아버지는 아직 인생의 봄을 기다린다. 꼭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봄을 기다린다고들 한다. 아마도 계절의 왕을 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춥고 기나긴 겨울을 지난 끝에 드디어 생명이 자라는 봄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응, 그러면 반드시 겨울을 지내고 나서야 봄을 만끽할 수 있다. 1년의 시작인 1월과 2월은 겨울이니까, 겨울이 지나고 나서 봄이 온다고 보는 게 이치에도 맞는다.


세상의 계절은 항상 정방향으로 흐른다. 연두색 봄이 지나 파란 여름이 오고, 붉은 가을을 지나면 하얀 겨울이 온다. 하얀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 이건 이 세상에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그렇게 회전하는 계절 중에서 나는 사실 여름을 가장 싫어한다. 여름은 무덥고 조금만 활동을 해도 지친다. 장마나 태풍이 오면 조금 시원해져서 살만하지만, 장마가 끝나면 곳곳에 있는 물웅덩이에서 자라난 파리나 모기가 너무 많아져서 잠 못 이루는 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에게 여름은 그저 어떻게든 견뎌낼 뿐인, 빨리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는 계절이다.




선선한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오면 나는 괜스레 쓸쓸한 기분이 든다. 연말이 지나면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 이뤄놓은 것도 하나 없는데. 나에게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세상의 봄이, 아직 한여름의 장마나 한겨울의 한파 속에서 살고 있는 나를 놀리듯이 지나간다. 세상의 계절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지만, 내 삶의 계절은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의 봄은 나도 모르는 새 이미 지나가 버린 걸지도 몰라.


내가 봄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린 봄을,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을 좇아 살아가는 삶은 비참하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나는 장차 무엇을 바라 살아가면 좋을지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반드시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고. 칠십 먹은 내 아버지도 여전히 봄을 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나의 계절은 끝나지 않는 장마 속에 갇혀있다. 여름의 장마철은 매우 잠깐인데, 나의 장마는 아마 구간 반복 설정을 걸어둔 테이프처럼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다. 계절은 이따금씩 거꾸로 흐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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