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앞에서

by 이루체

밤 열두 시,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연다.

딱히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른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한 동작일 뿐이다.


틈새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안에는 어제 먹다 남은 반찬 통, 날짜가 아슬아슬한 우유, 뚜껑에 소스가 말라붙은 병들이 들어 있다.

며칠째 변함없는 풍경이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굳이 그 안을 다시 들여다본다.


냉장고 조명이 부엌 바닥에 창백하고 네모난 빛의 조각을 만든다.

내 발끝이 그 빛의 경계에 걸쳐 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낮게 웅웅 거리는 모터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집 안에서, 무언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때때로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잠시 멈춰 서 있을 핑계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밀려올 때, 손은 가장 익숙한 곳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서 있는 이 짧은 시간 동안만큼은, 어떤 생산적인 일도, 대단한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된다.


프리다이빙을 할 때, 수심 16미터 지점을 지나면 몸이 저절로 가라앉는 '프리폴'의 순간이 온다.

발차기를 멈추고 그저 중력에 몸을 맡긴 채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는 시간.

냉장고 앞의 정적도 그와 닮아 있다.

하루의 소음을 뒤로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 머물며 잠시 나 자신을 가라앉히는 일.


거창한 위로나 대단한 깨달음은 없다.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방식일 뿐이다.

냉장고 문을 닫으면 부엌은 다시 어둠에 잠기고, 공기는 정적을 되찾는다.


내일도 아마 나는 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칸들을 바라보고, 다시 문을 닫으며 방으로 향하겠지.

그 반복되는 무의미함이 때로는 삶을 지탱해 준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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